남북정상회담을 보고 든 생각... 미래는 만들어가는 것
남북정상회담을 보고 든 생각... 미래는 만들어가는 것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8.05.09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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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어린 너에게 거는 기대

"역사적인 순간이 뭐야?"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날 저녁, 뉴스를 보려고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틀었다. 오전에 있었던 정상회담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고, 연이에게 의미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텔레비전 속 남자 앵커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만찬장 소식을 속속 전하고 있었다. 옥류관에서 가져온 평양냉면 제면기가 고장 나 북측 사람들이 안타까워 한다는 얘기, 비빔냉면과 물냉면 두 가지를 모두 먹고 싶어 한다는 아무개 씨 얘기, 옆집에서 일어난 일처럼 시시콜콜해서 더 정겹게 느껴지는 말들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화면 가득 남북 정상들의 환한 얼굴이 지나가고, 들뜬 듯 통일을 희망하는 초등학생이 지나가고, 도보다리에서 진지하게 밀담을 나누는 두 정상이 멀찍이 지나갔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잡아채 연이가 '역사적인 순간'의 뜻을 물은 건.

"응, 저기 안경 쓴 아저씨와 뚱뚱한 아저씨는 ‘원장선생님’인데, 이제 사이좋게 지내려고 오늘 만났대."

"왜?"

"연이도 친구랑 싸우고 나면 '미안하다' 하고, '괜찮아' 해야 마음이 풀리지? 남측이랑 북측이 오래전에 싸웠는데 그동안 사과를 안 하고 지냈거든."

"남측이랑 북측이 뭐야?"

"......."

연이에게 맞춤 맞게 얘기해보려 했지만 금세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좋을까. 비록 지금 당장 이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문득 고등학교 선생님 얼굴이 떠올랐다. 사회 선생님이 아니라 생물 선생님이 떠오른 건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가 수업을 하다 말고 '계엄'에 대해 얘기했던 까닭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지나온 세월을 더듬는 선생님을 우리들은 멀뚱히 바라만 봤다. 선생님은 남 얘기를 듣는 듯 무심한 제자들의 눈빛을 참지 못했다.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교정, 엄했던 분위기, 어깨를 펴지 못하고 걷던 시민들, 군인에게 맞서던 마지막 잎새 같던 학생들. 교단에 선 사내는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조금씩 격해졌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그의 감정을 이해하는 이는 없었다.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때, '계엄'을 끄집어내는 선생님은, 역사를 살아낸 자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인물처럼 느껴졌다. "너희들 정말 편한 세상을 살고 있구나" 하며 선생님은 결국엔 허탈하게 웃었다. 그날따라 왜 그러셨을까. 교탁을 사이에 두고 세월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걸 선생님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 텐데.

이번 기회에 세계지도를 마련했다. 고사리 손으로 우리나라를 짚어보는 둘째. ⓒ신은률
이번 기회에 세계지도를 마련했다. 고사리 손으로 우리나라를 짚어보는 둘째. ⓒ신은률

아이를 키우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도 새롭게 환기되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아이를 통해서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은, 숨어서 코를 파는 연이를 말리면서 어린 내 모습을 떠올리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기어코 동생을 밀치고 엄마 품으로 파고드는 연이를 안아주며 삼남매 중 맏이였던 나를 보듬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연이를 통해 기억나지 않는 개인사를 짐작하게 되는 한편, 무심히 지나쳤던 과거도 어떤 의미가 돼 돌아오기도 한다. 남북 정상회담을 보며 감동받는 내 모습이, 16년 전,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싶어 했던 생물 선생님과 겹쳐지는 건 그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가슴 뻐근함을, 연이는 책으로만 배우게 될 것이다. 소련의 마지막을, 냉전의 끝을, 유신시대의 뒷모습을 나 역시 글자로 배웠으니까. 활자가 돼버리면 뜨거웠던 '역사적 순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당연한 게 되고 만다. 나에게는 당연했던 민주주의가 생물 선생님에게는 아니었듯이, 연이의 미래에 놓이게 될 '남측과 북측'의 평화가, 실은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로 얻어진 것이라는 걸 마음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연이는 더 좋은 세상에 살게 되겠구나.’ 좋으면서도 믿기 어려운, 한편으로는 허탈하기도 한 감정. 그때의 선생님을 이해할 만큼 나이를 먹은 제자는 아이를 보며 당연하게 생각했던 과거를 곱씹어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게 과연 있을까.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보며 확신하게 된 한 가지는, 미래는 정말이지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희박한, 가능성을 믿는 것. 그것이 ‘역사적인 순간’을 만든다. 소설 ‘링’의 작가 스즈키 코지는 회사 생활을 하는 부인 대신 집에서 글을 쓰며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는 1등을 하기 위해서도,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서도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눈앞의 성적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것은 아이들에게 별로 의미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가 중요한 이유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그는 단언한다. 가능성을 믿는 아이들이 자라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아이들이 커다란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어른들이 도와야 한다고. 얼핏 사소해 보이는 개인의 공부가 인류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는 믿음.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배움의 기저에 깔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야 겨우 평화로운 '남측과 북측'을 상상해보는 나는, 연이가 나의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 가능성의 힘으로 당연한 것을 '만들어가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한다.

꼬물꼬물 소원 쓰는 연이. 아람미술관에서. ⓒ신은률
꼬물꼬물 소원 쓰는 연이. 아람미술관에서. ⓒ신은률

그러므로 연이야. 지금은 이걸 기억하면 어떨까.

살기 좋은 미래는 당연히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적인 순간'의 온도는 항상 뜨거웠다는 것을.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일 년에 절반은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드라마PD의 아내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7살, 5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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