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보행권 수준이 선진국 가르는 척도”
“골목길 보행권 수준이 선진국 가르는 척도”
  • 최규화 기자
  • 승인 2018.09.29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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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부터 괴로운 유모차③] 진장원 한국교통대 교통대학원장 인터뷰

【베이비뉴스 최규화 기자】

베이비뉴스는 유모차(유아차)를 끌고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해 2013년부터 매년 ‘유모차는 가고 싶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집 앞 골목길부터 시민의 보행권을 보장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보행권 전문가인 한국교통대 교통대학원장 진장원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기자 말

지난 13일 경기 의왕시 한국교통대 의왕캠퍼스에서 한국교통대 교통대학원장 진장원 교수를 만났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지난 13일 경기 의왕시 한국교통대 의왕캠퍼스에서 한국교통대 교통대학원장 진장원 교수를 만났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먼저 간단한 퀴즈 하나. 전 세계의 인구 천만 이상 도시 중 최초로 보행권 조례를 제정한 도시는?

정답은 뜻밖(?)에도 ‘서울’이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나라가 보행권 선진국이냐, 하는 질문 앞에서는 왠지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현실. 특히 골목길은 불량한 보도블록, 곳곳에 있는 턱과 연석(갓돌), 길을 점령하다시피 늘어선 노상주차, 그리고 과속 자동차 등 때문에 보행권 보장이 더욱 어려운 상황이다.

나와 내 아이들이 매일 우리 집 앞에서 맞닥뜨리는 현실.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까. ‘녹색교통운동’ 공동대표로 보행권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교통대 교통대학원장 진장원 교수에게 답을 구했다. 지난 13일 경기 의왕시 한국교통대 의왕캠퍼스에서 그를 만나 보행권의 개념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 교수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안심하면서 걸어다닐 수 있는 권리”가 바로 보행권이라고 설명했다. 보행권은 ‘길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했다. 모터라이제이션(motorization), 즉 자동차의 대중화를 통해 자동차가 길의 주인이 돼버린 ‘자동차 시대’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것이다.

‘사람은 편안하게 걸어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1960년대 유럽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년대 일본에서, 1990년대 한국에서도 나왔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유럽의 1960년대, 일본의 1970년대, 한국의 1990년대는 ‘인구 1000명당 승용차 보유 대수가 100대를 넘어서기 시작한 때’라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그때 보행권 주장이 나온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골목길까지 자동차가 침범해서 사람들이 골목길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되자, 보행권 목소리가 동일한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죠.”

◇ “골목길까지 자동차가 침범한 뒤 세계적으로 ‘보행권’ 주장 나와”

우리나라에서는 1993년 녹색교통운동이 ▲어린이 통학로 확보 운동 ▲장애물 없는 보도 조성 운동 ▲육교·지하도 대체 횡단보도 설치 운동 등을 추진했다. 그리고 1997년, 전 세계의 인구 천만 이상 도시 중 최초로 서울시에서 보행권 조례, 즉 ‘서울특별시 보행권 확보와 보행환경 개선에 관한 기본조례’를 제정했다.

서울시의 보행권 조례에는 “시장은 매 5년마다 보행환경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매년 연도별 시행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진 교수는 이 부분을 강조했다. 덕분에 덕수궁 돌담길 보도 정비 사업부터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 설치, 청계고가도로 철거, 버스전용차로 도입 등이 연이어 이뤄졌기 때문이다.

길 한가운데에는 양방향으로 자동차가 다니고 사람은 한쪽으로 난 좁은 보도로 다녀야 했던 덕수궁 돌담길은 자동차와 사람이 함께 다닐 수 있는 길이 됐다. 자동차는 지상으로 씽씽 달리고 사람들은 지하로 내려가서 건너야 했던 광화문 사거리에는 사방으로 횡단보도가 생겼다. 사람들은 편해졌고, ‘교통대란’은 없었다.

“지하도나 육교는 전형적인 자동차 우선 정책의 산물이거든요. 광화문 사거리에 횡단보도를 만들자는 건 당시의 패러다임으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어요. (광화문 횡단보도는) 보행권 운동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죠. 청계고가도로 철거, 버스전용차로 도입 등도 대부분 전문가는 말도 안 된다고 했고, 보행권을 주장하는 학자는 굉장히 소수였죠. 하지만 하나씩 바꿔보니 교통대란도 안 일어나고 문제가 없다는 걸 체득한 거예요.”

진 교수는 “우리나라는 골목길 보행권 사업을 탑다운(top-down, 하향식)으로 하다보니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진 교수는 “우리나라는 골목길 보행권 사업을 탑다운(top-down, 하향식)으로 하다보니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 보행속도보다 빨리 운전하면 안 되는 네덜란드 ‘보네르프’ 정책

우리나라에서 보행권 운동이 시작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뤄진 여러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보행권 선진국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진 교수는 그것이 바로 ‘골목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 나라의 보행권 수준을 가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지표가 바로 골목길이라는 것이다.

“제가 학생들한테 항상 이런 얘기를 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그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인지 보려면 골목길을 가봐라.’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골목길이 여전히 자동차 중심이고 보행권이 확보되지 않았다면 그 나라는 여전히 문화나 의식 수준으로는 후진국이라는 겁니다. 골목길 보행권 수준이 선진국의 척도입니다.”

진 교수는 서구 선진국들의 보행권 보장 정책들 가운데, 특히 1970년대의 네덜란드의 보네르프(Woonerf, 본엘프) 정책을 강조했다. 보네르프는 교통체증이 심한 큰 길을 피해 과속으로 마을길을 달리는 공사차량이나 트럭들로부터 마을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운동에서 출발했다.

마을길을 위험하게 달리는 자동차에 항의하기 위해 한 주민이 자기 집 앞에 화분을 놓았다. 그것을 본 다른 주민들도 각각 집 앞에 화분을 놓기 시작했고, 결국 마을길은 좁아지고 구불구불해졌다. 자동차들은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큰 길로 갈 때와 다를 바가 없어진 자동차들은 마을을 통과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마을은 안전해졌다. 더불어 아름다운 화분들이 길에 놓이면서 꽃길이 됐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것을 ▲보차공존도로 ▲저속제한속도 ▲교통정온화 기법을 특징으로 하는 정책으로 발전시켰다. 연석이 없고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없는 것이 특징인 보네르프를 진 교수는 “철저하게 사람이 우선인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보네르프에는 “▲보행자는 도로 폭원 전부를 사용할 수 있다. 도로상에서 놀아도 상관없다. ▲운전자는 사람의 보행속도보다 빨리 운전해서는 안 된다. ▲운전자는 보행자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등의 규정이 있다. 이것은 영국의 홈존(Home Zone), 일본의 커뮤니티존(Community Zone) 등으로 확산됐다.

◇ 일본은 어떻게 해서 골목길 보행권을 보장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사람이 우선인 골목길을 우리는 왜 가질 수 없을까. 진 교수는 보네르프 사업을 모범적으로 도입한 일본의 성공요인을 짚어보는 것으로, 그 이유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골목길 보행권 정책이 성공한 첫 번째 이유는 ‘차고지 증명제’다. 일본이 1962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차고지증명제는 자동차 소유자가 주차장을 확보해야만 자동차 등록이 가능한 제도. 우리나라는 1990년대 이후 몇 차례 도입을 추진했지만 보류됐고, 제주도만 2007년부터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많은 도시의 골목길은 폭 7미터 정도에 양쪽으로 노상주차가 돼 있어서 일방통행로 정도밖에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정부가 손을 놓고 있죠. 주민들이 반발한다는 이유로, 정책적으로 거의 버려져 있어요.”

일본의 두 번째 성공요인은 ‘민관 협력’. 진 교수는 “일본은 철저하게 민과 관이 협력해서 골목길을 개선했다”며, 반면 우리나라는 “붕어빵 찍어내듯이 탑다운(top-down, 하향식)으로 하다보니 실패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세 번째로 꼽은 것이 ‘장기적 관점’이다. 진 교수는 “우리나라는 성과 위주라서 무조건 기한 안에 예산을 써야 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완성을 시키려다 보니까 부작용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주민과 주민 사이, 민과 관 사이에 합의가 될 때까지 계속 ‘밀당’을 합니다. 이것 자체가 마을을 만드는 하나의 과정인 거죠. 조사를 해보니까, 서울은 골목길 개선 사업이 평균 8개월, 길어야 1년 만에 끝났는데, 일본은 평균 4년, 길게는 10년까지도 걸렸어요.”

마지막 네 번째는 주무 부처의 인식 차이다. 진 교수는 “우리나라 국토교통부는 골목길은 도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국도나 고속도로 같은 큰 도로만 자기네 소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2012년 보행증진법(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을 만든 곳도 국토교통부가 아니라 행정안전부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골목길 사업 예산을 계속 확보해서 지원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30년 전에 보행권을 주장하면서 꿈꿨던 사업이 일본은 이뤄졌고 서울은 여전히 제자리걸음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진 교수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실천과 함께 정부나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치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진 교수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실천과 함께 정부나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치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 “민관 협치가 중요… 공무원 성과주의 덫 걸리면 절대 성공 못해”

진 교수는 앞으로 골목길 보행권 확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네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일단 보네르프처럼 자동차들이 안전하게 운행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인 도로 시설이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규제와 처벌. 진 교수는 “우리나라는 많은 분야가 그렇겠지만 특히 교통 분야가 처벌이 너무 솜방망이”라며, “골목길에서 시속 30㎞ 이상으로 달리다가 사고가 나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로는 언론이나 정치권 등에서 적극적으로 보행권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을 전환하도록 나서야 한다는 점을, 네 번째로는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관 협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 중 약 40%(2010년 38%)가 보행자, 즉 길을 걸어가다가 죽습니다. 네덜란드는 11%(2010년), 미국은 12%(2009년)니까 거의 네 배 가깝거든요. 우리 운전자들과 도로 시스템이 얼마나 보행권을 배려하지 않는지가 나타나는 건데, 이것이 보행권 수준을 가늠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죠.”

네덜란드의 보네르프 사업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실천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할까. 진 교수는 서울 강서구의 ‘화곡본동 보행로 안전주민모임’의 사례를 들었다.

화곡본동 보행로 안전주민모임은 2016년 ‘주민 100인 원탁회의’를 통해 골목길 보행권 문제를 해결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이후 전문가를 초청해 강의도 듣고, 마을 골목길의 교통량, 교통속도 등을 직접 조사해서 정책 의견을 냈다. 그들의 정책은 2017년 ‘걷기좋은서울 시민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 뒤로도 화곡본동 보행로 안전주민모임은 보행로 실태조사나 보행로 개선 아이디어 제시 등의 활동을 하며 적극적인 운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진 교수는 훌륭한 협치 모델로 이들을 소개한 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도록 관이 말로만 협치가 아니라 진짜로 물심양면 도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음에 주민들을 조직하는 일에 정부와 지자체의 역할이 필요해요. 주민들에게 모티브를 던져주고 전문가와 연결해주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촉진자 역할을 해야죠. 근데 이게 잘 안 되는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아까 말씀드린 공무원들의 성과주의예요. 그 덫에 걸리면 절대 성공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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