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 수업이 한창이었다. 그때 한 아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쪽 구석으로 가 조용히 통화하던 아이는 “선생님 몇 시에 끝나요?”라고 물었다. 수업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은 늘 일정하지만 오늘은 이것저것 봐줘야 할 것이 많아 15분 정도 늦게 끝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아빠가 물었나 보다. 아이는 아빠에게 이 말을 전했고,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아이는 당황해하며 “모르겠어… 알겠어…” 하더니 얼굴이 벌게진 채로 전화를 끊었다. 왠지 마음이 찜찜해 아이에게 물었다. 아빠가 화가 나신 거냐고.
“수업이 좀 늦게 끝난다고 하니 화를 내셨어요.” 아이가 답했다.
“정말? 수업이 늦게 끝나서 화내시는 거야? 왜 너에게 화내시는 거야?” 놀라고 미안한 마음에 재차 묻게 됐다. 그때 옆에 있던 한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어휴~ 이유 없어요! 원래 어른들은 이유 없이 그렇게 화를 내요.”
그 당시에도 어른이었고, 앞으로도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 난 몹시 속상했고 부끄러웠고, 또 미안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아빠가 수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왔는데 수업이 늦게 끝난다고 하니 짜증을 내신 거였다. 차 안에서 기다리는 게 싫으셨던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힘든 일이다. 그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 짜증나기도 한다. 맞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물음이 있었다.
‘근데 왜 아이에게 화를 내지?’
어릴 적, 엄마가 나에게 엄청나게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외출 후 돌아오신 엄마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들어오자마자 머리빗이 보이지 않는다며 큰소리를 내셨다. 이 머리빗이 어디 갔냐며 날카롭게 물었고, 모르겠다는 나의 대답에 엄마는 몹시 화를 내셨다. 하지만 그 빗은 엄마만 사용하는 빗이었고 나는 그것을 만진 적도 없기 때문에 나에게 화를 내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뿐이었다.
아주 사소한 해프닝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어른의 ‘사소한 화’가 아이에게는 생각보다 큰 상처가 되기도 하는가 보다. 성인이 돼 한 번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낸 적이 있었다. 엄마는 ‘그깟 일 가지고 뭘 또 얘기하냐’며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셨고, 결국 그 일은 매듭짓지 못한 채 나는 그냥 옹졸한 딸내미가 됐다.
그래서 그냥 짐작해볼 뿐이다. 엄마는 밖에서 기분이 상한 상태로 돌아오셨고, 제자리에 있어야 할 엄마의 물건이 보이지 않아 짜증이 더해졌을 것이다. ‘빗이 어디 갔냐’는 물음에 딸이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찾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 자리에 앉아 태평하게 ‘모르겠다’는 답을 했던 것이다. 그게 화를 부추겼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이 때문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 때도 있고 '내가 도를 닦는구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화의 근원지가 아닐 때에도 화의 종착지가 아이인 경우가 제법 있다.
얼마 전 백화점 앞에 서 있다가 5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어머니 두 분의 대화를 듣게 됐다. 한 분이 딸과 있었던 다툼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셨다.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대화가 오래도록 맴돌았다.
“아니 글쎄, 막 화를 냈는데, 그 녀석이 말대답을 하더라고, 근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걔 말이 맞는 거야. 나 엄청 당황했잖아.“
“그래서 어떻게 했어?”
“뭐 어떻게 해~ 더 화냈지. 거기서 어떻게 미안하다고 그래. 더 화내고 나와버렸지.“
“하하 하하.”
듣고 있던 나는 웃음은커녕 내가 막 억울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어른이지만 왜 우리 어른들은 이리도 비겁할까. 밖에서 기분 나빴던 것을 왜 만만한 아이에게 풀며, 억울해하는 아이에게 버릇없이 말대답한다고 되레 호통을 치는 것일까. 부모가 조금 더 용기를 내야 하는 건 아닐까.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고. 그건 미안하다고. 네가 맞다고.’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사과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나의 지인 중 한 명은 아이 넷을 키우는 엄마다. 어느 날 초등학생인 큰아들과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방을 잔뜩 어질러놓고 치울 생각을 안 하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했단다. 아이는 모두 다 치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이분도 나름의 논리로, 조금 강압적으로 지금 당장 치우라고 했나 보다.
그랬더니 아들이 이랬단다. “엄마! 엄마는 힘들 때 나에게 도와달라 하면서 엄마는 왜 내가 힘들 때 도와주지 않아요?”라고. 이럴 때 나 같으면 어떻게 답했을까. 이분의 답이 의외여서 놀랐다. “아… 알겠어. 미안. 힘들면 ‘힘들다’ 얘기를 하지 그랬어. 몰랐지~ 알겠어. 도와줄게.” 그리고 같이 방을 정리했단다. 참 멋진 엄마다.
아이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아이에게 화를 낼 때가 문득 찾아온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혹은 지금 아이에게 사과를 해야 함을 알면서도 잘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곤 그냥 넘어간다. 사소한 일이니 금세 잊힐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이는 그 순간을 생각보다 오래 기억한다.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면 처음에는 황당했다가 억울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존감에 생채기가 나는 것이다. 나의 아이가 '자신은 소중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 아이가 커서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의 말이 맞았음에도 도리어 아이에게 화를 내는 부모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겁나는 사실은 이 아이가 나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온다는 것이다. 나의 행동, 나의 말투, 나의 가치관까지 아이의 삶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답은 아주 명료하다. 아이가 보여줬으면 하는 모습을 내가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요즘 책들을 보면 왜 그런 말 많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를 배려해야 하고 공감해주어야 하고, 마음을 읽어줘야 한다고. 잘못을 했을 땐 빠르게 인정하는 것이 피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하다고. 대인관계에 적용되는 이런 공식이 나의 아이에게 먼저 적용돼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우리 부모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매우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김경옥은 아나운서로, ‘육아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일하는 엄마, 육아하는 방송인’이다. 현재는 경인방송에서 ‘뮤직 인사이드 김경옥입니다’를 제작·진행하고 있다. 또한 ‘북라이크 홍보대사’로서 아이들의 말하기와 책읽기를 지도하는 일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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