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여행
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여행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8.12.31 13: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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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치앙마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지금 우리 가족은 태국 치앙마이에 있다. 요즘 유행하는 '한달살기'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 달 조금 넘게 살다 갈 계획이다. 여기는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어디쯤에 속해 있다. 아침에는 제법 선선해진 공기를 느끼며 눈을 뜬다. 해가 더 높아지면 물놀이도 가능할 정도로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향해 덤벼들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텐데 날씨가 더운 쪽에 가까우니 새해라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자꾸만 날짜를 잊는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8월 9월 어느 날이려니 하는 것이다. 치앙마이 사람들에게 겨울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습관처럼 확인하는 포털 뉴스에서 연일 최저기온을 찍는 한국의 날씨가 꽤 비현실적인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온 지 2주가 넘었다. 6시간 비행 끝에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치앙마이 국제공항은 오래 체했던 사람처럼 지친 여행자들을 토해내느라 바빴다. 이름도 모른 채 서로 다른 체취를 풍기는 사람들이 마구 섞였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한껏 설레던 마음을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는지 집을 떠난 지 겨우 9시간 만에 딱딱해서 자주 뒤척이던 돌침대가 그리워졌다.

캐리어 세 개에 등가방 하나씩, 아이 둘. 언제쯤이면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일이 가뿐해지는 걸까. 공항에서 챙겨야 하는 모든 것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곳의 낯섦을 한꺼번에 들이마시고 나니 공항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갑자기 푹해진 날씨 탓인지 자정을 향해 가는 깜깜한 이국은 조심해야 할 것들로만 이루어진 장소처럼 보였다.

짧은 기다림 끝에 숙소로 가는 택시가 왔다. 택시 안내원에게 목적지를 말하자 여행 책자에서 알려주는 것보다 비싼 요금을 불렀지만 그런 불친절함이 우리의 존재를 알아봐주는 것 같아 오히려 안심이 됐다.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기 위해 남편은 조수석에 타고 아이들과 나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금세 연이는 내 어깨에 기대어 꾸벅이고 윤우는 무릎을 베고 작게 누웠다. 차창 밖으로 따뜻하고 낯선 풍경이 쉬지 않고 흐릿하게 지나갔다.

숙소는 사진으로 볼 때보다 오래돼 보였다. 나무로 된 낡은 체리색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서자 역시나 온통 체리색 가구로 꾸며진 거실이 나타났다. 곳곳에 태국식 전통 의상을 입은 그림이 걸려 있고 돌로 된 바닥은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시원했다. 방에 비해 크기가 작은 전등 때문인지 온 방의 불을 다 켜도 어두침침했다. "귀신 나올 거 같아~" 농담을 하며 웃었지만 내내 으스스한 기분으로 짐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뜨니 창을 넘어온 햇살이 허락도 없이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창 너머에는 우리가 있는 3층을 훌쩍 넘긴 키 큰 나무들이 짙은 초록을 무성하게 펼치고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어젯밤엔 검정으로 꽉 차 있던 액자가 이렇게 멋진 풍경을 담고 있었다니. 어둠 속에서 긴장했던 어제의 내가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흔들리는 나무가 여행자를 토닥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달살기'가 시작됐다.

◇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는 날들

이곳에서도 어느새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생활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주로 서로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연이는 물놀이를 좋아하고 윤우는 숙소에서 퍼즐이나 숨은그림찾기를 하고 싶어한다. 남편은 맛집과 마트에 갈 때 표정에 화색이 돈다.

그러니 하루는 물놀이를 하고 하루는 마트에 가고, 숙소에 있고 싶어하는 윤우를 얼러서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가는 게 주요 일과다. 한국에서와 차이가 있다면 아이들은 유치원에 가지 않고 아빠는 회사에 가지 않는 정도일까.

비행기 타고 왔으니 뭐라도 해야지 싶어서 사원이든 박물관이든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가는 길에 윤우는 워터멜론 주스, 연이는 망고 주스로 밀도 높은 공기를 시원하게 잊는다. 이미 부부 손엔 숙소 앞 코튼트리(cottontree coffee roasters)에서 받아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다.

네 사람의 취향을 확인할 때마다 좀 더 가까운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생활 반경이 좁아졌는데도 하루가 풍요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엄마아빠의 손을 놓고 아이들이 달려갈 때

이곳에 있으니 특히 반복되는 순간들이 감사하다. 외출 준비가 끝나면 언제나 아이들이 먼저 숙소 문을 열고 나간다. 우리가 뒤따라 나서 현관문을 잠글 때면 아이들은 복도 오른쪽 끝 창문에 매달려 있다. 복도창에서 옆집 수영장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곳에 놓여있는 주인 없는 미키마우스 튜브가 잘 있는지 매일 확인하는 것이다.

"가자~" 하고 부르면 아이들은 어깨에 햇살을 가득 지고 엘리베이터로 뛰어온다. 1층으로 내려오면 로비로 나가는 문을 서로 열겠다고 나선다. 연이보다 키가 작은 윤우가 번번이 시무룩해지고, 잠깐의 소란 끝에 문이 열리면 두 아이가 질세라 신나게 달려나간다. 아이들을 보고 부부는 웃으며 손을 잡는다. 매일 비슷하게 하루가 열린다.

제 집을 나서는 듯 익숙하게 달려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기념하듯 사진으로 남겨둔다. 엄마아빠 손을 잡고 낯설게 걸었던 길을 이제는 둘이서 천진하게 뛰어간다. 그 힘찬 몸짓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성한 초록을 보는 것처럼 즐겁다.

반복은 아이들의 힘이다. 했던 퍼즐을 또 하고, 봤던 튜브를 또 보고, 뛰던 장소를 또 뛰어나가는 하루. 도돌이표를 거치면서 음악이 고조되듯 무수한 반복은 아이들이 커나갈 것이란 약속이라는 걸 안다.

아이들의 웃는 얼굴은 언제 보아도 좋다. ⓒ신은률
아이들의 웃는 얼굴은 언제 보아도 좋다. ⓒ신은률

그러므로 부모가 애써야 하는 일은 단순하다. 무엇이든 충분히 반복해주는 것이다. 반복해서 함께 먹는 아침, 반복해서 눈을 마주치는 일, 반복해서 하는 사랑한다는 말, 반복해서 걷는 모든 길 속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다시'를 아는 아이들은 그것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부모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 될 것이다.

며칠을 떠나 있든, 그곳에서 자신의 평범한 삶을 위해 작은 다짐을 할 수 있으면 충분히 좋은 여행이다. 모든 일을 멈추고 어쩔 수 없이 느림을 반복하고 있으니 이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치앙마이에서 남은 날들을 보내고 돌아간 후에, 제자리걸음처럼 보였던 일상의 반복을 소중하게 가꾸며 살고 싶어졌다. 잠시 두고 온 내 생활의 더딤이 안녕하기를. 그리움 대신 이곳의 따뜻한 기운을 보낸다.

*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일 년에 절반은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드라마PD의 아내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일곱 살, 다섯 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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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p**** 2019-01-02 16:22:36
저도 곧 베트남 한달살이를 가요. ^^ 이 글을 보니 한달을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할지, 가늠이 되네요. 건강하게 여행 잘 하세요. 틈틈이 글 챙겨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