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도 더럽지 않을 수 있다
똥도 더럽지 않을 수 있다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9.01.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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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그럴 수 있다'를 알려주는 사이

"코끼리 똥으로 종이를 만드는 곳이 있네~"라고 말했을 때, 연이가 처음 한 말은 "으, 드러워!"였다. 그리고 "어떻게 똥으로 종이를 만들어~?"라고 물었다.

늘 조심해야 한다고 배웠던 고정관념은 성장의 비밀열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생각은 의외로 확고하다. 그 시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이라서 귀여운 맛이 있는 자기 확신. 연이 말대로 똥을 두고 결코 깨끗한 것이라고 두둔할 수는 없겠지만 더럽다는 말은 왠지 나를 좀 발끈하게 만들었다. "엄마아빠가 니들 똥을 얼마나 치웠는데 그러기야?!"

아마 연이를 낳지 않았다면 타인의 배설물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언젠가 연이의 똥에는 등급이 있었고, 그중 최상급인 황금색 똥을 보기 위해 노력하던 때가 있었다.

우는 걸로 자신의 모든 걸 표현하는 조그만 것을 안고 있을 땐, 똥의 기원을 파악하고 나면 잠시 해방감 같은 걸 느끼기도 했다. 우리 연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구나. 나를 짓누르고 있던 근심걱정이 '휘발'되는 기분. 정말로 최선을 다해 똥을 살폈다. 그때 똥은 단순한 똥이 아니었다. 육아의 북극성이자 선생님이었다. '똥님'이었다.

코끼리똥을 말린다. 그러면 냄새는 사라지고 섬유질만 남는다. 말린 똥을 하룻동안 끓여서 부드럽게 만든다. 흐물해진 똥(98%)과 쓰고 남은 재활용 종이, 물감 등을 섞어 칼라 찰흙처럼 만지기 좋은 덩이로 뭉친다. 그걸 찰박한 물속에서 얇게 편 후 햇볕에 6시간 정도 말린다.

코끼리똥으로 종이를 만드는 전반적인 과정에 대해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후, 아이들과는 똥덩이를 얇게 펴서 양지에 두는 작업을 같이 했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햇볕과 바람이 다홍빛 종이를 완성해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마른 종이를 만지며 연이는 "진짜 똥이 종이가 되네?" 하고 재미있어 했다.

'푸푸페이퍼'에서는 코끼리똥으로 종이를 만든다. 방문자들이 만들어놓은 종이를 말리는 중이다. ⓒ신은률
'푸푸페이퍼'에서는 코끼리똥으로 종이를 만든다. 방문자들이 만들어놓은 종이를 말리는 중이다. ⓒ신은률

내가 애쓰지 않아도 친절하지만은 않은 시간이 차차 알려주겠지만, 오늘 나는 연이에게 '그럴 수도 있다'를 가르쳤다.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있고, 더럽지 않을 수 있고, 무언가 예쁘고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똥은 그럴 수 있다, 아니 똥도 그럴 수 있다.

품 안에 있는 자식에게 해줘야 하는 부모의 역할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종종 보여주는 게 아닐까. 섬유 유연제를 한 방울 떨어뜨리듯, 어려서 완고한 아이들이 세상을 좀 더 유연하고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게, 그렇게.

◇ 실은, 아이에게 배운 것

연이가 내 배 속에 자리를 잡았다는 걸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입덧이 찾아왔다. 메스꺼움으로 시작하고 닫는, 정말이지 내 생애 가장 길었던 하루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서 기운 없이 늘어져 있을 때 향을 맡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사프란, 라벤더, 시트러스, 자스민…. 울렁거리는 속을 잠시나마 달래주던 향은 마음씨 고운 사람의 얼굴처럼 이름도 예뻤다.

30년 동안 줄곧 변하지 않던 취향이 기분 좋게 바뀌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평소에 향수나 디퓨저 같은 향을 맡으면 금세 코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리곤 했으니까.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매순간 놀라웠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연이는 배 속에 있을 때처럼 향을 좋아한다. 뭐든 냄새를 맡아보고 싶어하고, 좋은 향은 갖고 싶어한다. 연이를 낳고서, '그럴 수도 있었던' 나는 진한 향을 피하는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나에게 내키지 않는 어떤 냄새가 누군가에게는 행복이자 위안이 되는 것을 '진짜로' 아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들을 중심에 놓고 살게 되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곱씹는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서 자주 뒷전에 놓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도.

◇ 나를 성장시키는 아이들을 빼고서, 내 삶을 정의할 수 있을까

치앙마이까지 와서 똥을 만지러 다니고, 놀이터나 동물원 등지를 찾아다니면서 동서남북 여러 나라 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동질감 같은 걸 느낀다. 아이들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 특유의 피곤함과 안정감이 있다. 부모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곳에 왔을까, 아이들을 위해 얼마큼 더 노력해야 할까. 다른 부모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묻고 싶어진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를 위해 떠나왔든 이곳의 온화함은 공평하다는 것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그 따뜻함에 감탄하다보면 좋은 엄마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 다시 힘을 내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 이곳의 온화함에 빚지고 있는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민소매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고향은 한겨울이라고 말하는 덴마크 가족들에게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전해주면서, 떠나온 곳에서는 우리 모두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짓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분명 어딘가 메말라가고 있었을 테고, 생동하는 아이들의 보드라운 살을 부빌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타국에서 보내는 따스한 겨울이 믿어지지 않는 것만큼 지금의 우리 모습도 스스로 놀랄 정도로 평온하다.

부모의 이름으로 버텨야 하는 시간을 '희생'이라고 말하는 건 편협한 구석이 있다.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쓰는 만큼 아이들도 부모를 변화시킨다. 나를 성장시키는 아이들을 빼고서 내 삶을 정의하는 게 가능할까. 혼자일 때처럼 마음껏 나를 위한 여행을 즐길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럴 수 있다'는 걸 배우고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렇게 버텨낸 시간은 서로에게 나름의 의미를 남길 것이다.

원래 온난한 곳이어서인지, 자라나는 '어린 가족'이 많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치앙마이는 따뜻해서 편안하다. 바람도 얌전한 이곳에서 미풍이 스치듯 지나가면, '북방의 장미'라는 이곳에 부비고 있는 우리에게서도 은근한 장미향이 나기를. 잠시 온화했던 우리가, '그래, 우리가 그럴 수도 있었지' 라고 추억된다면 이번 여행은 충분히 완벽할 것이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일 년에 절반은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드라마PD의 아내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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