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상을 환기하는 '기점'은 어디입니까
당신의 일상을 환기하는 '기점'은 어디입니까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9.05.0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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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육아감옥]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나만의 공간

요즘 연이와 윤이를 데리고 주말마다 미술관에 다니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나를 위해 움직인다. 그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잠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나 할까. 온전히 나의 주관대로 작품과 마주할 수 있어서 좋다. 틀린 건 아닌지, 더 잘 할 수는 없는 건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려울 때도, 사람과의 관계가 복잡할 때도, 어느 미술관이든 다녀오면 힘이 난다. 두어 시간 조용히 바라보고 오면 무엇 때문에 생긴 건지도 모르는 스트레스가 풀린다. 소중해서 자꾸만 무거워지는, 때로는 지긋지긋한 일상이 산뜻해지는 기분이다. 그럴 때면 한숨 돌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공간에는 힘이 있다. 집에서보다 도서관에서 집중이 잘 되는 이유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그만의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방지축, 쉬지 않고 재잘대는 아이들도 미술관에 들어서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 조용한 분위기에 압도되면 계속 주의를 주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은 스스로 입을 다물고 눈을 연다. 감각을 새롭게 열 때 생각의 가지는 쑥쑥 뻗어나간다.

◇ “공간은 제3의 교사다”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지역에서 시작된 ‘레지오 에밀리아’ 교육은 공간의 특별함에 주목한다.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생각의 범위가 달라지는 까닭이다. 네모난 강의실보다는 제멋대로인 숲이, 정형화된 곳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에서 다양하고 깊은 생각이 나온다는 건 합당한 추론이다. 공간은 어떤 쓰임새가 있다고 스스로 얘기하지 않지만 특별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저절로 환기(re-fresh)된다.

그렇다고 일상적인 공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 한 구석, 매일 가야하는 교실, 혹은 회사도 ‘공간으로서 사유될 때’ 특별해질 수 있다. 운전석에 앉아 자신의 삶을 글로 남기는 ‘그냥 버스기사’ 허혁처럼. 그는 길에서 스치듯 만나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운전대를 잡으면 점점 거칠어지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좁은 운전석에 앉아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반복되는 하루를 사유한다.

그에게 도로가 일상적 공간이라면, ‘기점’은 ‘힐링 공간’일 것이다. 기점은 그에게 여러 의미가 있다. 조용한 곳, 바람을 느끼는 곳, 스트레칭을 할 수 있는 곳, 때로는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90도로 접혀 있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누이는 곳,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로에서의 길었던 긴장을 잠시 끊어보는 곳, 그리하여 다시 몸을 일으켜 기어를 올리고야 마는 곳, 새롭게 출발(re-start)할 수 있는 곳이다.

어떤 이는, 일상의 공간을 아예 바꾸어보기도 한다. 우리에게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년)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철학가 한병철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땅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동경을, 아니 절박한 욕구를 느꼈다. 그래서 매일 정원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생활에서 몸으로 일하는 생활로 전환한 것이다. 그는 세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안 계절을 느끼고 정원을 가꾸면서, 우리가 사는 ‘현재라는 시공간’을 고민했다.

“정원에서 나는 계절을 훨씬 더 강하게 느낀다. 다가오는 겨울을 앞둔 고통도 그만큼 커진다. 빛은 점점 더 약해지고 옅어지고 희미해진다. 전에는 빛에 그토록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 죽어가는 빛이 고통스럽다. 정원에서는 무엇보다도 몸으로 계절을 느낀다. (중략) 오늘날 잘 조율된 디지털 세계에서 점점 더 잃어가고 있는 현실감, 몸의 느낌을 되돌려준다. 정원에는 감각성과 물질성이 넉넉하다. 모니터보다 정원이 훨씬 더 많이 세계를 포함한다.” (한병철, '땅의 예찬' p.22)

파주 블루메 미술관의 새로운 전시, "초록엄지-일의즐거움". 다양한 정원의 일을 형상화한 작품과 체험들이 마련돼 있다. 연이가 자신의 성격을 생각하며 풀을 고르고 있다. ⓒ신은률
파주 블루메 미술관의 새로운 전시, "초록엄지-일의즐거움". 다양한 정원의 일을 형상화한 작품과 체험들이 마련돼 있다. 연이가 자신의 성격을 생각하며 풀을 고르고 있다. ⓒ신은률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세계의 디지털화라는 행진을 하면서 땅을 떠났다. 생명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는 땅의 힘을 우리는 더는 느끼지 못한다. 그 힘은 모니터 크기로 줄어들고 만다.” (한병철, '땅의 예찬' p.32)

연이는 '망설이는, 탄력적인, 번득이는' 등의 풀을 심었다. 자신을 아는 것,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을 아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신은률
연이는 '망설이는, 탄력적인, 번득이는' 등의 풀을 심었다. 자신을 아는 것,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을 아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신은률

내가 10대였을 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추울 때 추위에 떨며 일하고 더울 땐 땡볕에서 일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연을 따르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어린 나에게 겁을 주었던 이는 누구였을까. 한병철의 정원에서는 그 말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린다. 그는 계절의 변화와 순환을 놀라워하고, 꽃들의 이름을 익혀가면서 자신의 세계가 확장된다고 느낀다. 정원이라는 그만의 공간 속에서 그는 삶을 보는 눈을 재구성(re-structure)한다. 지긋이 세상을 보는 눈길이 다정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형상화한 박혜린 작가의 작품. 작가에게 봄은 지나침, 여름은 시끌벅적함, 가을은 바라봄, 겨울은 쉼의 의미를 지닌다. ⓒ 신은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형상화한 박혜린 작가의 작품. 작가에게 봄은 지나침, 여름은 시끌벅적함, 가을은 바라봄, 겨울은 쉼의 의미를 지닌다. ⓒ 신은률

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나의 일상을 생각한다. 눈이 열리고 생각이 움직인다. 시끌벅적한 집, 분주한 부엌, 어지러운 거실을 떠올린다. 그곳은 꽤 긴 여름날을 닮았다. 나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높은 게 이상하지 않다.

우연처럼 어떤 장면이나 말들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벚꽃을 보고 “봄이 오면 내리는 꽃이야” 하고 감탄하는 윤이의 달뜬 표정,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연이의 입모양, “엄마 찌찌는 따뜻하고 평화로워” 하며 젖가슴을 찾는 손길 같은 것들. ‘힐링 공간’에서 곱씹어보는 일상은 채도가 높은 그림처럼 선명하다.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살림들에게 잠시 안녕을 고하고 나만의 공간 속에 조용히 자신을 두어본다. 생기를 가득 안고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환기(refresh)되고 재구성(restructure)된 일상에서, 새로운 이야기(restart)가 쓰여질 것이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글을 쓰며 '가정의 주인(主婦)'으로 살고 있다. 여덟 살 연이, 여섯 살 윤이를 키운다. 일 년의 절반은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남편에게 육아를 가르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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