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보다 더 무서웠던 것, 양육분담
신종플루보다 더 무서웠던 것, 양육분담
  • 칼럼니스트 엄미야
  • 승인 2018.01.25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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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엄마의 눈으로] 함께 낳은 아이, 함께 키웁시다
둘째의 신종플루는 엄마에게 아빠를 다시 볼 기회를 제공했다. ⓒ엄미야
둘째의 신종플루는 엄마에게 아빠를 다시 볼 기회를 제공했다. ⓒ엄미야

두 돌이 막 지난 둘째는 황량한 공장 문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래, 마음이 흔들리면 안 돼! 아이는 뭐, 나 혼자 낳았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타곤 시동을 걸었다.

신종플루가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2009년. 그렇게 내 아이만은 피해가시라 기도했건만 둘째는 덜컥 신종플루 확진 판정을 받았다.

사실 이후 신종플루는 일반 독감보다 치사율이 낮은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다시 알려졌지만, 당시 모 연예인의 아들이 죽고, 연일 몇 명이 죽었다는 둥, 언론이 공포를 끊임없이 극대화하는 바람에 특히 아이가 있는 집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성인의 경우에도 신종플루 확진 판정을 받으면 출근을 못 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어린이집이나 학교는 당연히 등원, 등교가 거부당했고.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야 하는 맞벌이 부부에게 가장 미치고 환장할 노릇은 전염병 때문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질 때이다.

우리 둘째는 참으로 효녀이기도 하여, 남들 한 번만 걸린다는 수두도 두 번이나 걸렸고, 신종플루도 어김없이 걸려주었다. (그 덕에 현재 면역력은 동급 최강이라고 자부하지만)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 만에 짠, 하고 나아 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다행히 주말이 껴있으면 3~4일 휴가로 해결할 수 있지만, 길어지면 일주일 내내 집에서 끼고 있어야 하는 일이라는 게 문제. 게다가 그 휴가가 온전히 나만의 몫이라면?

남편의 주장은 이러했다.

- 자신의 임금이 나보다 높다.
- 고로 자신의 휴가수당이 나보다 높다.

- 그러므로 자신이 휴가를 사용하는 것은 가계의 손실이다.

-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아이를 돌봐야 한다면 저임금자인 내가 휴가를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인 해결책이다.

아이가 신종플루 확진을 받고 이틀까지는 내가 휴가를 내고 아이를 돌봤다. 당시 내가 출퇴근하던 곳이 지역노조라 회사처럼 근태가 까다롭지는 않아도 그래도 급여를 받고 출근하는 일터였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밀려있었다. 셋째 날이 됐을 때 나는 기약 없는 휴가를 설마 나에게만 미뤄둘까. 당연히 남편이 하루 이틀쯤은 자신도 휴가를 낼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남편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내가 하루 휴가를 쓰면 얼만 줄 알아?”

출근하는 남편을 보며 부들부들 떨리던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점심시간쯤 아이를 챙겨서 남편 회사로 찾아갔다. 그리고 경비실 앞에서 전화를 했다.

“애 지금 경비실 앞에 데려다 놨어. 데리고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나도 출근해야 하니까”

그 날 결국 경비실 앞에 덩그러니 서 있던 아이를 돌보아줬던 건 남편 회사의 노동조합 상근자들이었다. 다행히 노동조합 사무실 옆에 매점도 있어서 아마도 딸아이는 ‘삼촌’들이 사주는 과자며 음료수를 하루종일 원없이 먹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 날의 일은 우리 부부가 육아 문제로 다툴 때 고정 레퍼토리로 등장하곤 했다. “아이는 나 혼자 낳았느냐”는 내 주장의 끝에는 늘 그 날 이야기가 나왔고, 남편은 그 날 자신도 아이를 데리고 결국 조퇴를 했다며 억울해했다.

어찌 됐든 그 날 “돈 못 버는 네가 아이를 돌봐”라는 남편의 태도는 제아무리 합리적임을 가장한 말 속에서도 나에겐 내 노동을 ‘이류’로 치부하는 것처럼 비수가 되었고, 남편은 나에게 ‘남녀평등’ 하지 않은 사람으로 ‘찍’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몇 해 전 드라마로 만들어진 만화 ‘미생’에 나오는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 선 차장처럼 악착같이 일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아 진급이라도 하면 내 아이는 “저런 비정한 엄마 손에 자라는 불쌍한 아이”가 되고, 영화 ‘미씽’의 지선(엄지원 분)처럼 아이가 아파서 휴가라도 날라치면 “지 ‘새끼’밖에 모르는”, 그래서 “여자랑은 같이 일 못 하겠다”는 비난을 들어야 하는 이 사회 현실에서,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여.

세상의 돌림병을 막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왜 신종플루에 걸린 아이를 받지 않느냐고 어린이집에 1인 시위를 나가달라는 것도 아니다. 설거지로 ‘평등’하다 자랑 말고, 정말 위기가 닥쳤을 때 나도 아이 아빠임을 팍팍 티 내주시길 부탁합니다. 함께 낳은 아이, 함께 키웁시다.

*칼럼니스트 엄미야는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2학년 두 딸의 엄마다. 노동조합 활동가이자, 노동자 남편의 아내이다. “아이는 국가가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교육 추종자이며, 꿈이 있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은 따뜻한 낭만주의자이기도 하다. 현재 경기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 민주노총 성평등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금속노조 경기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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