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이 악몽이 될 때
임신이 악몽이 될 때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1.12.02 0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십개월의 미래’(2020)

난임 시절, 주변 사람들의 혼전 임신이나 계획하지 않은 둘째 임신 등의 소식을 들으면 그렇게 착잡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죽도록 임신을 계획하는데, 왜 계획하지 않은 자들은 덜컥 임신에 성공하는가! 그 사람들이 임신을 했다고 내 임신의 기회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비합리적인 짜증이라고, 내 이성이 경고등을 울려도 내 감정은 분노의 고속도로를 폭주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했다는 사람들은 내게 배 아프게 질투 나는 대상이었다.

29살의 게임 개발자 '미래'는 남자친구와 사귀다가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린나래미디어㈜
29살의 게임 개발자 '미래'는 남자친구와 사귀다가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린나래미디어㈜

‘십개월의 미래’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속속들이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 ‘미래’의 임신은 나의 임신 경험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었다.

임신을 확인하고 길을 걷다가 문득, 내 생애 처음으로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이 무엇인지 느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끼야아아, 내 뱃속에 아기가 있다니!’ 정말 물리적으로 몸이 가벼워져서 내 발이 바닥에서 3cm쯤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난임 기간 동안 징글맞게 매정한 한 줄(=비임신)만 보여줬던 임신 테스트기. 그런데, 두 줄이라니!

친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며 한 무더기의 임신테스트기를 보여주는 미래. ⓒ그린나래미디어㈜
친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며 한 무더기의 임신테스트기를 보여주는 미래. ⓒ그린나래미디어㈜

미래도 외쳤을 것이다. 두 줄이라니! 남자친구와 지난 6개월 간 관계를 한 기억이 없는데 도대체, 어째서, 어떻게, 임신이 된 거란 말인가. 미래는 친구 앞에서 가방을 뒤져 임신 테스트기 열다섯 개를 쏟아낸다. 나는 4년 내내 두 줄이 뜨기만을 바라면서 하고많은 임신 테스트기를 사고, 한 줄 보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미래는 한 줄이 뜨기만을 바라면서 그 많은 임테기를 샀겠지. 그럼에도 우리 둘 다 했던 생각은 똑같을 것이다. ‘이 임테기 불량은 아니겠지? 불량이어야만 해!’

미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간 스타트업 회사에서 임신 때문에 해고 위기에 몰린다. ⓒ그린나래미디어㈜
미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간 스타트업 회사에서 임신 때문에 해고 위기에 몰린다. ⓒ그린나래미디어㈜

아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세상이 내게 문을 닫은 것 같다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반대로 미래는 임신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인생의 문이 하나씩 닫힌다. 우선은 경력의 문이 닫힌다. 미래는 스타트업 회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미래 말로 ‘영혼을 갈아 넣고’ 있었는데, 임신을 했다고 밝히자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사장은 미래의 임신 소식을 듣고 말한다. “너는 근데 그걸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말을 하냐. 나 지금 너무 배신감 드네.”

평범하게 잘 사귀고 있던 미래와 윤호 커플, 그러나 임신 이후에는... ⓒ그린나래미디어㈜
평범하게 잘 사귀고 있던 미래와 윤호 커플, 그러나 임신 이후 연애의 양상이 달라진다. ⓒ그린나래미디어㈜

다음으로는 순탄하게 잘 굴러가고 있던 연애가 삐거덕거린다. 미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난자와 정자의 수정 시점(!)을 남자친구 윤호는 추정해낸다. 미래가 임신 중단을 고민하며 잠적해버리지만, 윤호는 미래를 찾아내서 아기를 낳자고 한다. 그런데 아기를 낳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결혼이라는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다.

이 커플에게는 우선, 돈이 없다. 미래는 회사에서 잘렸고, 윤호는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했다. 채식주의자 윤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버지의 양돈 사업장에서 일한다. 돼지들을 죽이면서 윤호는 스트레스에 짓눌린다. 미래의 배는 불러오는데 경제적 기반이 잡혀있지 않으니 결혼 준비 속도가 더디다. 윤호는 갑자기 미래에게 “넌 엄마잖아.”라고 말하며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자신의 삶이 구석에 몰리고 있다고 느끼자 “이 애가 내 애가 아니니까 지운다는 생각을 했겠지?”라며 미래를 몰아세운다.

임신 소식을 듣고 "이건 운명이야, 우리 결혼해야겠다!"라고 외쳤던 윤호. ⓒ그린나래미디어㈜.
임신 소식을 듣고 "이건 운명이야, 우리 결혼해야겠다!"라고 외쳤던 윤호. ⓒ그린나래미디어㈜

임신 중단의 문도 굳게 닫혀있다. (영화의 배경은 낙태죄가 사실상 폐지된 2021년 이전이다). 처음 찾아간 산부인과 의사는 산모의 건강에 해를 끼치거나, 강간을 당했거나, 근친상간일 경우에만 임신 중절이 합법이지만 그것도 증명을 해야 한다고 건조하게 말한다. 임신 중절이 가능한 병원의 상담 직원은 자신들은 위험 부담을 안고 불법 수술을 감행하는 거라고 생색을 낸다.

미래의 주치의로 나오는 산부인과 전문의 '옹중'을 맡은 배우 백현진의 연기가 일품이다. ⓒ그린나래미디어㈜.
미래의 주치의로 나오는 산부인과 전문의 '옹중'을 맡은 배우 백현진의 연기가 일품이다. ⓒ그린나래미디어㈜

나는 임신 중단이라는 이슈 앞에서 늘 내 입장을 선명하게 정하지 못했었다. 페미니스트로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천주교 신자로서는 태아의 생명권을 옹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실감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과 현생을 온 힘을 다해 감당하고 있는 여성의 삶을 똑같은 무게로 달 수는 없다는 것을.

나에겐 임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던 꿈이지만, 바라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갑자기 인생을 뒤집는 악몽이 될 수 있다. 임신 잘 되는 사람(?)에게 샘만 내던, 나처럼 속 좁은 관객에게 이 당연한 사실을 설득해낸 건 이 영화가 내내 담담한 위트를 잃지 않은 덕분이다.

"이 하얀색 점이 정말 인간 맞죠...?" ⓒ그린나래미디어㈜.
"이 하얀색 점이 정말 인간 맞죠...?" ⓒ그린나래미디어㈜

너무 현실적이어서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잊을 만하면 웃음이 터져서 코미디 영화 같기도 하다. 아, 먼 미래의 걱정까지 사서 하는 양육자의 입장에서는 나의 자녀들이 이성애자라면 반드시, 필사적으로, 철저하게, 피임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교훈을 주는 건전한 영화이기도 했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베이비뉴스는 창간 때부터 클린광고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언론으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뉴스는 앞으로도 기사 읽는데 불편한 광고는 싣지 않겠습니다.
베이비뉴스는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대안언론입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에 동참해주세요. 여러분의 기사후원 참여는 아름다운 나비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베이비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베이비뉴스와 친구해요!

많이 본 베이비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8 경찰공제회 자람빌딩 B1
  • 대표전화 : 02-3443-3346
  • 팩스 : 02-3443-3347
  • 맘스클래스문의 : 1599-0535
  • 이메일 : pr@ibabynews.com
  • 법인명: 베이컨(주)
  • 사업자등록번호 : ​211-88-48112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 01331
  • 등록(발행)일 : 2010-08-20
  • 발행·편집인 : 소장섭
  • 저작권자 ©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인정보보호 배상책임보험가입(10억원보상한도, 소프트웨어공제조합)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유미 실장
  • Copyright © 2024 베이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ibaby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