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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품들, 믿고 쓰지 못하는 세상

신물질 독성테스트 허술…위험 입증되기 전까진 안전?

redist96@naver.com

[연재] 김나희의 불량정보 거기 서!

 

'위험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안전하다고 가정해야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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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세상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아기가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가져다 대는 문짝에 바른 페인트에 납이 없으려나? 목욕 대야에 환경호르몬은 없을까? 아기가 코를 대고 엎드리는 바닥에서 접착제 성분이 휘발돼 올라오지는 않나? 놀이터에 있는 목재에 비소는 없을까? 입에 넣는 종이에 표백제 성분은 없을지? 아기 양말 바닥에 미끄럼 방지로 코팅된 재료도 발암물질이라던데…. 대체 20세기의 인간들은 무슨 멍청한 짓을 한 걸까요? 어째서 21세기의 인간들은 정신 못 차리고 여전히 독극물을 생산하고 있는 걸까요?

 

유해 물질이 일반 가정에도 구석구석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지만 사회적인 대책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유해 물질 관리법과 관련 제도는 기본적으로 ‘위험성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안전하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포괄주의(negative system : 정해진 몇 가지 예외를 빼고 나머지는 모두 허용하는 방식)입니다. 해마다 신물질이 개발되고 생산되고 유통되지만, 사전 독성 테스트는 허술합니다. 특히 생식독성과 발달과정상의 독성, 그러니까 난자, 정자부터 태아와 유아들에 대한 위험에 대한 사전 검증 의무는 없습니다. 피해가 보고되기 전까지는 일단 쓰고 보는 식이죠. 그래서 지금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비스페놀A(BPA), 담배, 수은, 납, 임신부에게 처방되던 DES, 탈리도마이드, 다이옥신, 대표적 살충제인 DDT…. 이런 물질들은 아무 경고 없이 널리 쓰이다가 뒤늦게 엄청난 피해를 확인하고서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점차 사용이 금지됐습니다.

 

비스페놀A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환경호르몬(내분비계 교란 물질)의 위험성이 발견된 과정은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한편의 공포영화 같습니다. 1998년 미국의 과학자 패트리샤 헌트는 실험 중 건강한 생쥐의 비정상 난자의 비율이 40%까지 치솟은 것을 발견합니다. 원래의 실험을 제쳐두고 이 원인을 찾다가, 생쥐 우리와 물 그릇의 재료인 폴리카보네이트(플라스틱의 일종)가 범인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릇의 내용물이 아니라 그릇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니! 게다가 후속 실험으로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임신한 생쥐에게 폴리카보네이트 용기의 환경호르몬 성분인 비스페놀A를 접하게 하자, 태아 생쥐의 난자도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뱃속의 태아가 딸인 경우, 그 작디작은 딸의 배 안에는 평생 쓸 난자세포가 이미 저장돼 있습니다. 엄마 뱃속의 태아 안에 손자, 손녀가 될 난자가 들어있으니, 3대가 한 몸에 있는 셈이지요. 즉, 임신한 여성이 환경호르몬을 접하면 그 여성의 손자, 손녀까지 그 피해가 예정돼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환경호르몬도 호르몬과 마찬가지로 극미량만으로도 인체에 영향을 줍니다.

 

이 사실은 전 세계적인 충격을 몰고 왔습니다. 비스페놀A가 들어간 플라스틱은 투명하고 강하기 때문에 1960년대에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거든요. 아기들 젖병이나 장난감에도 으레 사용됐습니다. 깨지지 않고 가벼워서 아기용품으로 써왔던지라 충격은 컸습니다. 업계에서는 더 이상 이 물질을 아기용품에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제 법적인 규제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비스페놀A에 대한 규제는 유례없이 신속하게 이뤄진 편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기라도 한 셈이지요.

 

익히 알고 있는 유해물질도 제대로 규제되지 못하고 있는데, 해마다 신물질은 수만 가지씩 개발됩니다. 장기적인 독성 시험을 거치지 않고 일단 출시된 다음, 피해 의심 사례가 발견되면 ‘독성이 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고 발뺌합니다. 독성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시장에서 철수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위험성이 증명되기 전에는 안전하다고 가정하고 써도 된다? 태아, 젖먹이, 어린이들을 동의도 구하지 않고 무작위 임상 시험에 밀어 넣고 있는 셈입니다.

 

매연과 간접흡연을 피하고 유기농 식품을 먹고 화장품 라벨을 확인하는 등의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성 시험을 거치지 않은 신물질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 중 상당수는 맛도 냄새도 색깔도 없어서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피해가 발생하고 나서야 뒤늦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조 기업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상당수는 영유아, 임신부였습니다. 건강을 위해 가동한 가습기, 위생 때문에 사용한 살균제가 무고한 시민들을 역습했지요. 죄 없는 아기들과 젊은 여성들이 주된 희생자였다는 점이 더 가슴 아픕니다. 적어도 피해자의 규모는 확인해야 할 텐데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지지부진합니다. 현재 널리 쓰이는 제품 중에 가습기 살균제처럼 나중에야 그 피해가 확인될 상품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한숨이 나옵니다.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이라도 고쳐야 합니다. 이 환경참사를 거울삼아 유해물질 관리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위험성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안전하다고 가정’하는 것에서 ‘안전성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간주’하는 것으로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합니다. 안전하다고 확인된 것부터 하나하나 승인하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변환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은 포괄주의의 반대 개념인 열거주의(positive system)라고도 하지요.)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뤄내지 않으면 다음 환경참사의 사망자는 바로 내가, 또는 내 아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한 한의사(한방내과 전문의)이며 국제모유수유상담가이다. 진료와 육아에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이 둘 다 필요하다고 믿는다. 궁금한 건 절대 못 참고 직접 자료를 뒤지는 성격으로, 잘못된 육아정보를 조목조목 짚어보려고 한다. 자연출산을 통해 낳은 아기를 모유수유로 키우고 있는 중이며 대한 모유수유한의학회 운영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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