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어디가? "친구랑 우정여행"
엄마 어디가? "친구랑 우정여행"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18.05.0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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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번 해봤어] 잠시만, 도망갈게

나는 도망쳤다. 이래 저래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머리에 열개쯤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풀지, 풀어야 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더 꼬여버린 실타래들. 매일 눈물이 났다.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반, 숨기고 싶은 마음 반... 매일 하루에도 열두 번씩 뒤바뀌는 이런 마음을 안고 지내다 보니 말이 없어졌다. 무뚝뚝해졌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나를 보게 됐다.

내 마음이 이렇게 지옥인데 지난 3월에 하겠다고 한 강의가 있었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기사 쓰기 강의. 잘하고 싶어서, 재밌을 것 같아서 하겠다고 한 거였는데, 이 일까지 매일매일 내 어깨를 짓눌렀다. 강의안을 미리 보내 달라고 해서 더 그랬다.

퇴근 후 혹은 쉬는 날이면 머릿속에서 어김없이 모의 강의가 시작됐다. '시작은 이렇게 하고 중간에 이런 말을 하고...' 강의안이 아니라 대본을 쓰고 있었다. 맘에 들지 않는 대본은 매일, 매 시간 수정됐다. 이대로 강행하다가는 방송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아이들과 있는 시간, 남편과 있는 시간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강의는 5월, 남은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안 하다고 말할까, 지금 그래도 될까' 그렇게 도망쳐도 될까 싶을 때 운명처럼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 서평을 읽었다. 책에서 저자는 말했다.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벌어져서, 나 자신이 너무 싫고 괴로울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도망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도 썼다.

 

"정말 힘들 때는 잠깐 숨자. 지금 당장은 잠깐 도망치자. 회피하고 외면해도 괜찮다. 이 말은 정말로 아무도 안 해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에게 해줘야만 하는 말이다. 괜찮아, 잠시만 도망가자. 나중에 내가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상처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피가 멈출 때까지. 잠시만 숨어 있고 피해있고 외면하고 도망가자."

 

작가가 해준 말을 그대로 나에게 해줬다. 마음이 편해졌다. 강의를 대신해줄 동료를 찾았다. 너무나 고맙게 한 동료가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제야 친구와의 여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적어도 여행 가서 모의 강의를 하고 있지는 않겠구나, 안도했다.

"여행 가자."

친구와의 여행은 늘 이런 식이었다. 계획 없는 여행. "가자" 하면 그제야 짐을 꾸려서 떠나는 여행. 우린 둘 다 직장맘이지만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군이고, 다행히 아내의 자유로운 영혼을 인정해주는 남편들을 만나 해마다 불시에 이렇게 떠난다. 딱히 하고자 하는 게 없는 여행. 비행기표와 호텔만 잡으면 준비는 끝. 공항에서 만난 친구에게 미리 말했다.

"홍콩 가서 내가 매일 울더라도 그러려니 해. 이번 여행... 난 울러 간다."

"응? 왜... 너 좀 힘들구나? 알았어. 그냥 옆에 있어줄게."

"시도 때도 없이 울어도 창피해하지 마."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최은경홍콩행 비행기에서 읽은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최은경
홍콩행 비행기에서 읽은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최은경

밤 비행기. 책을 보던 친구는 잠들었고 나는 혼자 울었다.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으면서. 조금 속이 후련했다. 그 마음을 꾹꾹 눌러 메모했다. 신기하게도 그게 내 울음의 끝이었다.

"야, 너 여행 와서 운다더니 안 우네?"

"그러네. 여기 와서는 눈물이 안 난다. 비행기에서 울었는데."

"울었어? 몰랐네. 여행에 집중하다 보니 딴생각이 안 나서 그런 가봐."

"그런가 봐. 진짜. 슬픈 감정이 안 드네, 별로."

홍콩은 두 번째였다. 2년 전 패키지여행으로 딸과 함께 왔다. 고작 30분 머물면서 인상 깊었던 리펄스 베이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멍 때리면서 바다를 보고 싶었다. 호텔에서 한 시간 거리. 친구는 별 말없이 따라나섰다. 출발하는 버스가 예상보다 30~40분가량 지연됐다. 기다린 게 아까워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갔는데 막상 가니 예전이 그 느낌이 아니었다. 게다가 배고파서 마구 시킨 점심 메뉴도 별로였다.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다. 

"날씨가 좋았으면 좀 나았을 텐데 별로다. 예전 그 느낌이 아닌 것 같아. 괜히 왔나..."

"괜찮아. 내가 언제 이런 데 와 보겠어. 너 아니면 내가 여기까지 오진 않을 것 같아. 그래도 오는 길은 예뻤어."

친구와 함께, 도망치듯 떠나온 홍콩의 야경. ⓒ최은경
친구와 함께, 도망치듯 떠나온 홍콩의 야경. ⓒ최은경

친구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호텔에 돌아온 이후 잠들 때까지 긴 시간 호텔 바에 있었다. 책도 보고 와인도 마시고. 그때 친구가 물었다.

"근데 너... 왜 그랬어? 왜 울겠다고 그런 거야."

"어떤 책에선가 읽었는데 그러더라. 외로움은 혼자(개인)의 문제고, 고독은 타인과의 문제에서 오는 거라고. 난 아마 둘 다 왔나 봐."

"회사에서 역할이 달라졌다더니... 처음 해 봐서 그렇지 뭐. 뭔지 조금 알 것 같아. 나도 그런 적 있었던 것도 같고."

"난 회사에서 내 사생활 이야기하는 게 좀 그래. 굳이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잘 안 하는데 안 하니까 좀 소외되는 것 같고 공감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나도 그런데... 그런데 난 네가 왜 좋은지 알아? '애엄마'들이 늘 하는 이야길 안 해서 좋아. 너랑 이야기하면 나, 너,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잖아. 난 그런 게 좋더라고. 애엄마들은 집 샀니, 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남편 자랑 자식 자랑으로 끝나잖아. 물론 나도 남편 이야기하고 애들 이야기할 때도 있어. 그런데 굳이 일부러는 안 해. 그래서 내가 주로 싱글들이랑 노나 봐."

"하하, 그러네. 그것도 방법이네."

속 깊은 이야기 하다가, 책 보다가, 그 유명한 홍콩 야경을 보다가, 생각에 잠기다가 첫날을 보냈다. 이 친구랑 여행하는 게 특별히 좋은 이유는,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해서다. 여행은 같이 오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가능한 여행. 둘이 왔다고 꼭 옆에 붙어 다녀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혼자가 어쩐지 어색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6년째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이런 게 우리 여행 스타일이란 걸 알게 됐다. 버스는 물론 비행기에서도 옆자리가 아닐 때도 있다(이번에 귀국할 때도 각자 창가 자리에 앉았다).

물론 밥 먹을 때, 길 찾을 때, 술 먹을 때, 관람차를 탈 때, 수영할 때는 함께 한다. 혼자보다 둘이라서 더 좋을 때니까. 사진을 찍을 때, 그게 비록 전부 '셀카'라 할지라도 함께 찍는다. 더 말이 필요 없는 여행 메이트. 지난번 여행에서 서로의 여권을 보며 "남편보다 너랑 더 많이 다녔다"며 깔깔대고 웃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 하루 종일 있을까 싶었는데 친구가 그냥 가기 아쉬웠나 보다. "우리 어디라도 한 군데 갈까?" 세계에서 가장 긴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인근에 가보기로 했다. 패키지여행 때도 기억에 많이 남았던 장소였다. 2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거리. 나는 가이드를 자처했다. 이번엔 다행히 친구의 취향 저격이었다. 어쩌다 우연히 들어간 완탕면 식당도 여행자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맛집이었다. 당연히 꿀맛이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모닝글로리 비슷한 '풀떼기(그저 데친 야채인데 찍어 먹는 소스 맛이 좋더라)'까지 완벽했다.

미드 레벨 엘리베이터 인근 식당의 완탕면. ⓒ최은경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인근 식당의 완탕면. ⓒ최은경
목적지 없이 타다 적당히 내리는 트램 여행. ⓒ최은경
목적지 없이 타다 적당히 내리는 트램 여행. ⓒ최은경

든든히 배를 채우고 충전한 교통카드가 아까워 도심에 있는 트램도 탔다. 목적지 없이 타다 적당히 내렸다. 마치 예전에 자주 보던 홍콩영화 속 거리의 여인 1, 2가 된 듯했다. 웃고, 찍고, 걷고, 먹고... 친구 말처럼 한국에서의 내 고민은 홍콩행 비행기에 두고 내린 듯했다. 뭐가 그리 혼자 심각했나, 싶을 만큼. 도망쳐 보니 알겠더라.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더 엉키게 한 건 내 자신이었음을. 내가 안절부절 한다고 모든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오전 1시 서울행 비행기에서 짧게 단잠을 잤다. 도망쳤다 돌아왔지만 집도 회사도 아무 문제 없었다(물론 내가 도망쳤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특히 내가 괜찮았다. '적진으로 진격하는 장수보다 후퇴를 잘하는 장수가 진정한 명장'이라는 말도 있다지 않나. 그러니 때로 잠시만 도망쳐 볼 일이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2017년 5월 1일)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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