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석 장을 이어 붙여 책을 만들었습니다. 여섯 페이지로 이뤄진 작은 책입니다. 일곱 살 수린이의 첫 그림책 「미술관 가는 날」입니다.
오늘은 미술관 가는 날입니다. 수린이는 수린이네 집에서, 친구는 친구네 집에서 나왔습니다.
친구와 만나 버스를 탔습니다. 수린이와 친구, 단둘이서 미술관에 갑니다. 둘이면 조용히 작품 감상을 할 수 있지만, 셋이 모이면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지기 때문이랍니다. 오른쪽에 헤드폰을 끼고 있는 아이가 친굽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아이가 수린이고요.
전시실에 수린이 그림이 가득합니다. 수린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 코끼리 그림이 정중앙에 있습니다. 그 옆에는 무지개 그림도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수린이의 첫 전시회 날입니다.
집 그림이 있는 면이 표지가 되도록 반으로 접으면, 수린이가 집에서 나가서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미술관에 갔다가 친구네 집으로 놀러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수린이의 첫 그림책 「미술관 가는 날」 속 수린이 그림으로 가득한 전시실 장면에 언젠가는 자기만의 전시회를 열겠다는 수린이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일을 그만두기 전, 저의 일터는 서울시청 근처에 있었습니다. 지척에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미술관이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미술관 한 바퀴, 일찍 퇴근한 날엔 또 한 바퀴, 주말 출근 후 지친 몸을 달래며 또 한 바퀴, 그렇게 미술관은 저에게 삶의 쉼터가 돼 주었습니다. 누군가 “취미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저는 망설임 없이 “전시 관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미술관 나들이를 좋아했습니다.
두 아이를 두고 혼자서 미국에 장기출장을 갔을 때, 주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거기서도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뉴욕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구겐하임과 휘트니, 메트로폴리탄과 클로이스터스 등 매주 열심히 다녔습니다. 뉴욕 맨해튼 시내를 돌고 또 돌았습니다. 그때 만난 마크 로스코와 잭슨 폴록의 작품은 낯설고 신선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꼭 다시 보고 싶었어요.
직장을 그만두고 어린 아이 둘을 키우면서 미술관 나들이는 그림의 떡이 되었습니다. 세 살 수린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일곱 살 수민이를 걸려서 버스를 타고 미술관에 갔던 날을, 세 사람 모두 지옥 체험을 했던 날로 기억합니다. 네 살 수린이와 여덟 살 수민이를 모두 걸려 미술관에 갔던 날엔 다리가 아프다고 보채는 수린이를 엄마가 한번 언니가 한번 번갈아 업어가며 작품 감상을 했습니다. 다섯 살 수린이가 미술관 벤치에서 잠이 드는 바람에 전시 관람은 못하고 수린이가 잠에서 깨기만을 기다리다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다리 아프고 졸리기만 한 전시 관람을 아이들이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의 고상한 취미 때문에 아이들 고생만 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곱 살 수린이의 그림책 「미술관 가는 날」에서 수린이는 그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엄마, 저도 미술관 나들이 좋아요. 전시장 가득 제 그림을 걸고 싶어요”라고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아이도 좋아한다니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리하여 두 아이와 함께 하는 미술관 나들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날씨 좋은 주말이면 미술관행 버스를 탔습니다.
수린이와 엄마가 좋아하는 미술관 나들이 코스를 소개합니다.
⓵ 서울시립미술관을 관람하고 근처에서 일하시는 아빠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⓶ 덕수궁미술관을 관람하고 서울도서관에서 그림책을 실컷 본다.
⓷ 국립현대미술관을 관람하고 삼청동과 인사동을 한 바퀴 돈다.
세 가지 코스 모두 좋습니다. 수린이가 자라서 다리에 힘이 더 생기면 그동안 멀어서 가지 못한 미술관에도 가 볼 거예요.
일곱 살 수린이가 그림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림 제목은 ‘잭슨 폴록 아저씨 그림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어요’ 랍니다.
미술 교습소에서 잭슨 폴록 아저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답니다. 바닥에 큰 종이를 깔아 놓고 물감을 뿌리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 아저씨의 작업 방식이 인상 깊었나봅니다. “그림 그리는 건 춤을 추는 것처럼 신나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답니다. 수린이는 그림으로 잭슨 폴록 아저씨의 전시장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림 제목처럼 잭슨 폴록 아저씨의 그림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습니다.
잭슨 폴록 아저씨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먼저 바닥에 큰 종이 한 장을 깝니다. 큰 종이 주변에 두꺼운 종이로 만든 가드를 세웁니다. 구슬을 여러 개 씻어서 물감을 짜 놓은 그릇에 담습니다. 물감이 잔뜩 묻은 구슬을 큰 종이에다 굴립니다. 가드가 있어서 구슬이 종이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 번 구슬과 물감을 바꿔가며 굴리면 그림이 완성됩니다. 큰 종이를 잘라 네 개의 작은 그림으로 만듭니다. 새 종이에 네 개의 작은 그림을 붙여서 잭슨 폴록 아저씨의 전시장을 완성했습니다. 엄마와 언니, 수린이가 그림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림에서 수린이는 엄마와 언니에게 잭슨 폴록 아저씨의 그림을 소개합니다. “그림 그리는 건 춤추는 일이야.” 수린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언젠가 뉴욕의 미술관에서 보았던 감동이 다시 떠오릅니다.
열 살 수린이는 미술관 나들이를 좋아합니다. 이제는 엄마보다 더 열심히 전시장을 돌아다닙니다. 엄마가 다리가 아파서 조금 쉬자고 해도 어림없습니다. 나를 위한 공간이 세상 곳곳에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미술관이 수린이에게 삶의 쉼터가 돼 주면 좋겠습니다. 안젠가 자신의 전시회를 열겠다는 수린이의 꿈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칼럼니스트 김정은은 글 쓰는 엄마입니다. 다년간 온가족이 함께 책을 읽은 경험을 담은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2016)과 엄마와 두 딸의 목소리를 담은 「엄마의 글쓰기」(2017)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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