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이 필요한 이유
'하얀 거짓말'이 필요한 이유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8.11.2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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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연이와 빨간 자전거

드디어 연이에게 자전거가 생겼다. 연이가 일곱 살이 되면 자전거를 가르쳐줘야겠다, 마음을 먹고 있긴 했었다. 여전히 아이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 ‘빠른 것보다는 조금 느린 게 좋다’는 주의이기도 하지만 자전거는 왠지 아빠와의 추억으로 남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전거 얘기만 나오면 “조금만 더 기다리자. 아빠가 한가해지면 사줄게” 했다. 다행히 겨울이 오기 전에 남편이 바쁜 일을 끝내고 시간을 낼 수 있게 됐다. 자전거와 함께 늦가을 바람 속으로 부녀를 내보낼 때가 온 것이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서 남편과 동네 자전거 가게에 들렀다. 가게 사장님은 연이가 또래보다 자전거를 늦게 시작하는 편이라 지금 나이대에 많이 타는 자전거는 금세 작아질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래 탈 수 있는 큰 사이즈 자전거를 권했다. 하지만 큰 사이즈 자전거는 연이가 바라는 공주 캐릭터로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지금 딱 맞아 얼마 못 타게 될 자전거를, 윤우에게 물려주기 어려운 ‘공주풍’으로 사자니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자전거가 나름 고가의 장난감인지라 돈이 아까울 것 같았다.

남편과 상의 끝에, 보조바퀴가 달린 작은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 앞으로 1년 정도 타고서 윤우에게 물려주면 될 것이다. 큰 사이즈 자전거는 그 후에 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남매가 함께 쓸 만한 자전거를 사는 게 합리적일 거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오래 기다린 만큼 네 마음에 드는 공주 자전거를 사주마!’ 연이와 두 손 걸고 했던 약속이 계속 걸렸다. 아이의 요구를 맞춰줄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테지만 현실은 딜레마의 연속이다. 취향 저격이냐, 합리적 소비냐. 자칫 잘못하다가 연이가 새 자전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우리는 빨간색 자전거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누가 선물해줬다고 하면 돼요~.”

이게 뭐라고 심각한 아우라를 풍기며 속닥거리고 있는 부부에게 사람 좋게 생긴 사장님이 허허 웃으며 말씀하셨다. 가게에 오는 부모들이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한다. 부모가 긴 고민 끝에 자전거를 사가도 아이들은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이거 싫어, 바꿔줘’ 한단다. 그런데 똑같은 걸, ‘선물로 받았다’고 하면 별 소리 없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기분이 좋아지는 ‘선물의 마법’ 같은 걸까. 그 말을 들으니 간택당하기를 바라고 서 있는 빨간 자전거가 한 톤 밝아지는 듯 보였다.

우리 얼굴에 드리웠던 고민스러운 표정이 소나기가 서둘러 지나가듯 사라졌다. 화창해진 날씨처럼 이제부터는 고민이 즐겁다. “그럼 자전거를 누구한테 선물받았다고 하지? 할머니? 이모?” 목소리에 ‘ㅋㅋ’가 달린 듯 부부는 신이 났다. 선물을 주는 당사자는 본인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남 좋은 일을 하자니 거짓말을 꾸미는 데도 착한 일을 하는 것 같아서 기분 좋은 스릴이 느껴졌다. 엄마아빠가 맘먹고 고른 빨간 자전거는 ‘할머니께서 선물해주신 걸로 하자’고 결정이 났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집 앞에 서 있는 반짝거리는 자전거를 본 연이는 ‘웬 자전거지?’ 싶었는지 그 자리에서 잠시 멈췄다. 짜여진 각본대로 “할머니가 사주셨어~”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하고 되묻는 연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연이는 “할머니 최고야!”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오래 기다린 만큼 연이는 크게 기뻐했다. 공주 자전거가 아니라고 아쉬워하지도, 자전거 색깔이 어떻다고 따지지도 않았다. 낑낑거리며 자전거 바퀴를 굴리는 연이 뒤에서 부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연이의 순수함이 고마웠다.

빨간 자전거와 연이. 연이가 웃으면 엄마도 좋다. ⓒ신은률
빨간 자전거와 연이. 연이가 웃으면 엄마도 좋다. ⓒ신은률

◇ 빨간 자전거와 하얀 거짓말

부모와 자식 사이를 좋게 만들어주는 ‘하얀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부모가 된 이후로 가끔은 연극 무대에 선 것처럼 역할놀이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 부모가 몰래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것도 그런 연극 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까지 이 연극의 목적은 ‘착한 행동을 해야 보상을 받는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실은, ‘하얀 거짓말’의 효과를 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심을 잃어버린, 논리만 가득한 어른들이 다시금 아이들의 순수함을 대할 때 연습해 두어야 할 방식인 것이다.

요맘때 아이들은 융통성은 별로 없는 대신 생각보다 더 단순하다. 산타 할아버지를 철썩같이 믿는 시기의 귀여운 맛이 있달까. “나쁜 행동을 하면 안 돼!”라고 엄하게 가르치기보다 “착한 아이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신대” 하고 돌려 말하는 게 아이의 행동을 원하는 방식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방법을 적절히 사용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말은 언제나 마음보다 빨리 나선다. 논리적이고 직설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야 ‘저 어린 것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후회할 때가 많다. 말로 아이를 이끌려는 순간, 글자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와 감정 싸움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해도, 설득도, 훈육도 어느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 산타클로스가 주는 교훈, 에두르는 말의 다정함

자전거 가게에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자전거의 종류와 가격 등을 비교해보았다. 실제 크기가 어떤지 얼마큼 튼튼한지 감이 오지 않아 며칠 동안 주문을 망설였다. 이렇게 결정을 못 하느니 조금 비싸더라도 가게에 가서 직접 보고 사자고 했던 거였다.

우리가 인터넷으로 자전거를 주문을 했다면 ‘각본’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연이의 바람대로 작은 공주 자전거를 샀다면 윤우가 아른거리며 아쉬웠을 거다. 반대로, 약속과는 다른 디자인의 자전거를 주문하고 연이를 설득하려 했다면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도 연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엄마가 됐을 것이다. 엄마는 설명하다 지치고 연이는 못내 속상함을 감췄을지도 모른다.

대화와 설득이라는 건 부모의 편에서 봤을 때는 늘 권장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애를 써서 설명하고 설득한다고 해도, 이 시기의 아이는 부모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논리력도 말발도 아이들은 부모 수준을 따라오기 힘들다. 한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맨날 엄마 마음대로 해!”라는 소리가 뒤통수를 때리는 이유다. 오히려 ‘하얀 거짓말’이 아이들 입장에서는 훨씬 이해하기 쉽고, 다정하다. 부모의 잔소리보다 가상의 산타클로스의 존재가 아이들에게 와닿는 것처럼, 엄마의 긴 설명보다 할머니의 선물이 더 기쁜 것처럼 말이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도 산타클로스를 믿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가 부모의 ‘하얀 거짓말’이 많이 필요한 시기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융통성이 생기고, 논리력이 다져질 그때까지 부모는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를 기다려줘야 한다. 연이가 한 뼘 더 성장할 때까지, 너무 논리적인 엄마보다 ‘하얀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을 아는 여유로운 엄마가 되고 싶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줄 거라 믿는 순수한 때도 소나기처럼 금세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에둘러 그 귀여움을 만끽해도 좋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일 년에 절반은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드라마PD의 아내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7살, 5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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