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배우러 가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남자니?"
운동 배우러 가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남자니?"
  • 칼럼니스트 엄미야
  • 승인 2019.01.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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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미야의 일하는 엄마의 눈으로] 폭력에 대한 옳은 감수성을 길러줘야 한다

아이들과 삼겹살을 먹으러 동네 식당에 갔다. 마침 식당 텔레비전에서, 예천군의회 의원들이 외유성 연수에서 가이드를 폭행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무슨 얘기냐고 물었고, 내가 막 설명을 하려던 차에 옆 테이블 일행들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왜 때렸대?”

“미친놈도 아니고, 뭐 괜히 때렸겠어?”

“기분 나쁜 소리를 했나보지.”

군의원이 일반인을 폭행하는 영상이 세상천지에 낱낱이 까발려졌는데도, “때릴 이유”를 찾는 가해자의 시선에 머물러 있는 50대(이상으로 보이는) 남성들의 대화에 순간 욱, 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사실 어디선가 들어본 낯설지 않은 레파토리라고 생각하니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맞고 사는 여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은 (과도한 노출이나, 늦은 밤 거리를 돌아다녔거나, 술을 마셨거나, 헤프게 눈웃음을 쳤거나 하는) 무언가 빌미를 주었고, 하는 식의 이야기들. 굳이 가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해 피해자에게 피해의 ‘원인’을 이유를 애써 찾으려는 지겹도록 익숙한 모습들.

그날 고기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두 딸아이에게 “폭력은 어떻게든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침을 튀겨가며 말했지만, 이미 옆 테이블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온 작은아이는 온통 “저 아저씨(예천군의원)는 왜 가이드를 때렸을까?‘에 궁금증이 쏠려 있었다.

ⓒ베이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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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일도 있었다. 방학을 하루 앞둔 날, 큰아이가 집에 와서 씩씩거리길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인권교육을 했는데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집안일을 하기 때문에 집안일이 지루해서 수다를 많이 떠는 것이고, 남자는 사냥터에서 사냥을 해야 했기 때문에 조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부부 싸움을 할 때 여자가 남자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면 남자는 그것을 말로 대하지 못하니까 칼을 들 수 있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깊은 빡침’이 있었다나 뭐라나.

우리 집 두 아이들은 아무래도(엄마의 영향이겠지만) ‘폭력’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특히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 민감해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면서 일방적인 스킨십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맥락상 그 남성의 남자다움, 터프함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더라도) 입을 모아 “저건 데이트 폭력이야”라고 말하는 식이다.

아마 아이가 그날 학교에서 들은 인권교육은 그런 아이의 폭력에 대한 예민함, 젠더감수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학교 구성원(교사 등)들의 판단 부족 때문이었으리라. 요즘 아이들이 어떤데.

큰아이는 얼마 전 방학이 시작되자, 시험 때문에 중단했던 권투를 다시 시작했다. 또래보다 키가 작다고 고민이 많은 작은 아이는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운동을 하러 갈 때 “잘 배우고 와”가 아니라, “선생은 남자니 여자니”, “혹시라도 선생님이 이상하면 피하고, 엄마한테 바로 얘기해”가 인사가 되었다.

나만 그럴까? 이제 동네 아이들이 흔하게 다니는 태권도, 축구, 농구, 검도 학원도 맘 놓고 보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예민하게 가르쳐야 한다. 가해의 시각, 폭력의 언어, 차별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아이로 가르쳐야 한다. 전교생이 모여 있더라도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 지금 말씀하신 건 잘못된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쳐야 한다.

조금 불편해도 나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그 정도 불편함은 괜찮은 거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 불편함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할 때 이 사회가 변한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서글프다. 이 글을 쓰면서도 밀려오는 씁쓸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겠다.

어른들이 해결하지 못한 걸 결국 아이에게 해결하자고 다시 알려줘야 하는 사회, 대한민국.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아이 키우기 무섭다. 헬조선.

*칼럼니스트 엄미야는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2학년 두 딸의 엄마다. 노동조합 활동가이자, 노동자 남편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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