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누가 뭐래도 '칼퇴근'이다
오늘은 누가 뭐래도 '칼퇴근'이다
  • 칼럼니스트 윤기혁
  • 승인 2019.01.2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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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남편의 알쏭달쏭 육아수다] 아이와 함께한 순간 '메멘토 모리'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이어령 교수의 소식을 접했다. 그는 암 진단을 받았지만, 투병 생활을 하진 않아 보였다. 항암이나 방사선치료 없이 정기 검진만 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 이야기 중 그가 병을 알게 된 후 삶이 더욱 농밀(濃密)해지고 있다는 말에서 눈이 멈추었다.

이어령 교수가 여섯 살 때 보리밭 길을 가고 있었다. 화사한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대낮의 정적 속에서 그는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님 다 계시고, 집도 풍요하고, 누구랑 싸운 것도 아니었는데, 당시 먹먹하게 닥쳐온 그 대낮의 슬픔을 그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순간이라 말했다. 그때부터 지금껏 글을 써온 게 전부 ‘죽음의 연습’이었고, 지금 그의 삶은 더욱 농밀해지고 있다고 했다.

내가 어찌 감히 이어령 교수에 비할 수 있을까만은 문득 내 삶에도 그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순간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방실방실 웃으면서도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면 찾아오는 먹먹함. 어쩜 내겐 아이와 함께한 육아휴직 기간이 메멘토 모리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베이비뉴스
방실방실 웃으면서도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면 찾아오는 먹먹함. 어쩜 내겐 아이와 함께한 육아휴직 기간이 메멘토 모리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베이비뉴스

궁리 끝에 2008년 10월을 떠올렸다. 첫째 딸이 태어났고, 6일 후 아버지가 암 수술을 받았다. 분만실과 수술실을 오가며 그때 생명에 대해,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에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순서와 머무르는 시간의 양과 질, 죽음 후의 세계, 남은 자의 고독, 우리라는 인연의 종말 등… 여러 질문을 품어보았지만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이 모든 질문을 반복되는 일상 속에 묻어버렸다.

5년 후 아이가 커서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을 때, 나는 육아휴직을 했다. 사정이야 있었지만 젖먹이가 아니니 나만의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가정에 부모의 손길이, 주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끊이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육아와 가사의 효율성을 생각하게 됐다. 아이가 등원한 후에야 차 한 잔의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아이가 초콜릿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술이 얼마나 귀여운지, 작고 통통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아빠라는 이의 거친 손을 꼬옥 잡는 순간 전해오는 온기와 충만함을 알게 된 것이. 그렇게 1년을 함께 지내며 화단에 핀 꽃을 보며 함께 흥분하고, 날아다니는 벌의 비행을 흉내내며 차곡차곡 추억을 쌓았다. 그렇게 우리라는 관계가 짙어질 즈음 복직의 시간이 다가왔다.

방실방실 웃으면서도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면 찾아오는 먹먹함. 어쩜 내겐 아이와 함께한 육아휴직 기간이 메멘토 모리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나란 인간은 한 번의 깨달음을 일상으로 확장하지 못한다. 결국 복직을 했고 다시 반복하는 일상을 핑계로 자녀와의 관계에서 굳은살을 만들어 냈다. 등록한 학원을 잘 다녀왔는지를 확인하고, 매일 약속된 학습량을 완료했는지를 챙긴다. 오늘 녀석의 입꼬리를 올리고 내리게 만든 순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손가락에 감긴 밴드는 언제부터, 왜 그곳에 있는지도 묻지 않는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으로 알려진 채사장은 후속작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서 "죽음이 안타까운 건 그것이 개체의 소멸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관계의 끊어짐 때문이리라"고 했다.

관계의 끊어짐은 죽음이라니. 나의 하루는 죽고 죽이는 죽음의 연속은 아닐까.

덜컥 자녀와 나의 관계가 그려진다. 점점 가늘어지는 아빠와 딸이라는 관계의 끈이 1년 후면, 5년 후면 어떻게 될까. 살짝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나는 중얼거린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누가 뭐래도 오늘은 칼퇴근이다.

*칼럼니스트 윤기혁은 딸이 둘 있는 평범한 아빠입니다. 완벽한 육아를 꿈꾸지만 매번 실패하는 아빠이기도 하지요. 육아하는 남성, 아빠, 남편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은밀한 속마음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저서로는 「육아의 온도(somo, 2014)」 「육아살롱 in 영화, 부모3.0(공저)(Sb, 2017)」이 있으며, (사)함께하는아버지들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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