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수린이는 우리 집 대통령
아홉 살 수린이는 우리 집 대통령
  • 칼럼니스트 김정은
  • 승인 2019.02.1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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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그림 엄마글] 말 트임이 늦었던 딸의 그림이야기

'장미대선' 즈음의 일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작은 수술이지만 오래 묵혀서 매우 까다로운 수술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입원했고, 한 달간 누워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남편이 휴가를 냈습니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고 저를 챙겼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수술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친정 엄마나 시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돌봐주셨기에 남편 혼자 오롯이 엄마 역할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세탁기 어떻게 돌리는 거지?”

남편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물어봤고 저는 알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세탁기를 돌린 적이 없었나? 결혼 전에는 잘했던 것 같은데….”

남편은 매우 미안해하며 집안일을 했습니다. 아이들 식사 챙기기, 학교 보내기, 설거지하기, 빨래하기…. 당장 하지 않으면, 다음 식사를 할 수 없고, 입을 옷이 없는 급한 일만 해치워도 하루해가 금방 진다고 했습니다.

퇴원을 하고 집에 돌아와, 먼지가 가득한 거실과 방들, 수북이 쌓여 있는 쓰레기와 엉망이 된 화장실을 마주했습니다. 집안일을 하기에 아이들은 너무 어리고, 남편은 일터로 복귀해야 했고, 저는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식사와 설거지, 빨래만 하기에도 힘이 달리는 상태였습니다.

“우리 집 대통령 뽑아요!”

아홉 살 수린이가 나섰습니다. 주말 저녁을 먹고 네 식구가 식탁에 모였습니다. 수린이가 준비한 종이에 이름을 써서 선거를 했습니다.

엄마 0표

아빠 0표

수민 1표

수린 3표

수린이가 3표를 받아 우리 집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수린이를 제외한 세 사람은 수린이가 왜 우리 집 대통령을 뽑자고 했는지 궁금해서 수린이를 뽑았습니다.

“난 언니를 뽑았는데, 내가 당선 됐네.”라는 당선 소감을 시작으로, 우리 집 대통령 아홉 살 수린이는 본격적인 일에 착수했습니다.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습니다.

“대통령이 엄마에게 묻겠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수린이의 눈빛과 말투는 정말 대통령 같았습니다.

“엄마는 무슨 일이 가장 하기 어렵습니까?”

한 달 동안 엉망으로 방치된 집안을 둘려보며, 제가 대답했습니다.

“음…, 화장실 청소.”

“또 없나요?”

“쓰레기 분리수거.”

“또 없나요?” 

우리 집 대통령 수린이가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화장실 청소

2. 쓰레기 분리수거

3. 청소기 돌리기

4. 탁자 정리

5. 의자 정리

회의가 시작됐습니다. 수린이가 말했습니다.

“화장실 청소 하실 분 있나요?”

엄마, 아빠, 수민이는 서로 눈치만 살폈습니다. 잠깐 시간이 지난 후에, 수민이가 말했습니다.

“저… 화장실 청소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알려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수민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가 끼어들었습니다.

“초등학생이 하기는 힘들어요. 엄마가 하겠습니다.”

다시 우리 집 대통령 수린이가 끼어들었습니다. 아빠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수린이가 말을 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엄마가 하는 일을 나누기 위한 회의입니다.”

아빠가 나섰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가 또 끼어들었습니다.

“아빠는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합니다. 한밤중에 화장실 청소를 하면 물소리가 나서 아랫집에 피해를 주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다시 우리 집 대통령 수린이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러면, 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화장실 청소를 하겠습니다. 엄마는 화장실 청소하는 법을 알려주세요.”

‘화장실 청소’ 안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이 났습니다.

수민 : "거실 화장실은 수린이랑 제가 사용하니까 제가 청소할게요. 샤워할 때마다 조금씩 하면 될 것 같아요."

아빠 : "안방 화장실은 엄마와 아빠가 사용하니까 아빠가 청소하겠습니다. 주말에 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수린 : "다음은 쓰레기 분리수거입니다. 아빠, 어떠세요?"

아빠 : "분부 받들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린 : "다음은 청소기 돌리기입니다."

수민 : "제가 하겠습니다."

수린 : "다음은 탁자 정리입니다. 탁자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수민 : "의자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우리 집 대통령 수린이가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1. 화장실 청소 - 거실 화장실 : 수민, 안방 화장실 : 아빠

2. 쓰레기 분리수거 - 아빠

3. 청소기 돌리기 - 수민

4. 탁자 정리 - 수린

5. 의자 정리 - 수민

우리 집 대통령 아홉 살 수린이가 주도한 회의 결과대로 모두가 잘 지켰습니다. 주말 아침식사는 아빠가 차리고 엄마는 설거지를 합니다. 온 가족이 집안일을 함께 하는 것이 일상이 됐습니다. 

엄마 새해 선물(11세 작품). ©유수린
엄마 새해 선물(11세 작품). ©유수린

명절을 앞두고 우리 집 대통령 수린이가 선물을 내밀었습니다. 새해 선물이랍니다.

“수린아, 이거 엄마 주는 거야? 수린이 덕분에 이제 엄마는 집안일이 정말 편해졌어. 이 선물 엄마 말고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것 같아. 엄마는 이미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았어.”

이제 열한 살 수린이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직 멀었답니다. 여전히 우리 집에서 엄마가 가장 일을 많이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도와주는 수준이라고요. 그래서 엄마가 선물을 받아야 한다고요.

“참, 수린아, 아홉 살에 대통령 선거 하자고 했던 거 말이야. 그때 왜 그랬어?”

열한 살 수린이가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프고 집은 엉망인데, 아빠 혼자 열심히 해도 집은 계속 엉망이고, 아홉 살 수린이도 집안일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엄마 일을 덜어내고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대통령 선거가 떠올랐고 누군가 대통령이 돼서 회의를 하고 엄마에게 몰려 있는 일은 나누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힘든 사람이 있나 없나 살피는 수린이.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든 일을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수린이가 존경스럽습니다. 우리 집 대통령으로 뽑길 참 잘했습니다.

*칼럼니스트 김정은은 글 쓰는 엄마입니다. 다년간 온 가족이 함께 책을 읽은 경험을 담은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2016)과 엄마와 두 딸의 목소리를 담은 「엄마의 글쓰기」(2017)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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