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덕에 비로소 쌀알 익는 소리를 알아간다 
아이 덕에 비로소 쌀알 익는 소리를 알아간다 
  • 칼럼니스트 이샛별
  • 승인 2020.06.1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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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듣는 엄마가 아닌 더 '잘' 보는 엄마로 성장하기] 엄마와 아들의 아침 인사

아이와 함께 하는 삶에서 ‘여유’를 찾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 여유는 아이가 잠든 밤이나 아이가 깨어나기 전의 새벽에만 누릴 수 있다. ‘엄마로 살아가는 데에 많은 것을 감수하고 산다’라는 문장을 요즘 체감하는 중이다. 

아이가 깨어나기 전 새벽, 한두 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그 습관을 유지한 지 벌써 8개월이 넘었다. 처음엔 불면증이 있어서 쉬 오지 않는 잠을 불러오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건전한’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새벽이 되었다. 늘 그렇듯 잠든 아이의 이부자리를 살피고 나서야 책 한 권을 집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 넘길수록 잊고 지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던 어린 나의 시선에는 주방이 늘 밝게 빛났다. 주방의 전등이 아른거릴 때 궁금한 마음에 문을 슬쩍 열어보면 엄마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밥솥에서 밥이 익는 냄새와 함께.

엄마가 되어가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다. 소리의 부재 속에서 크는 딸이 잠든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의 아지트에서 마음을 매만지던 엄마의 모습. 엄마에게 주방은 가족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차리는 곳이자,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을 달래는 ‘아지트’였다. 지금 나는 주방에서 책을 읽으며 아이가 아침을 맞이할 때를 기다린다. 책을 읽으며 지나간 엄마의 일상을 찬찬히 떠올려 본다.

새벽 여섯 시. 예준이가 일어났다. 우리는 아침 인사를 나누며 포옹을 한다. ⓒ이샛별
새벽 여섯 시. 예준이가 일어났다. 우리는 아침 인사를 나누며 포옹을 한다. ⓒ이샛별

‘소리의 부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뿐인데 여전히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살짝살짝 흔들리는 엄마 앞에서 예준이는 변함없이 엄마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다른 엄마 아빠와 다르게 더 많이 눈 맞춤을 하고, 손으로 더 많이 보여주려는 엄마 아빠의 이야기에 눈을 기울이는 예준이를 통해서 나는 하루하루 한 뼘 더 성장하는 엄마가 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역시 새벽 여섯 시 정각이 되자마자 아들 예준이와 아침 인사를 나누며 포옹을 한다.

아침 인사 몇 마디를 나눈 뒤에 예준이는 나의 무릎 위에 익숙한 듯이 앉는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생우유에 빨대를 꽂아 주니 이내 받아들고 ‘카~’ 하며 곧잘 마신다. 한참 우유를 마시던 예준이가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옹알거린다. 

“응? 예준아? 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아무런 미동도 없는 주방을 가리키는 예준이의 손끝이 전기밥솥을 향해있다. 내 시선 또한 예준이의 손끝에 머물렀을 때 밥솥에서 하얀 김이 팍! 하고 피어올랐다.

“아~ 밥이 끓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지금껏 쌀알이 익는 소리도, 밥솥의 취사 시간이 다 되었다는 알림음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소리를 알아가는 예준이와 함께 하는 일상은 말한다.

'소리는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기 마련이다.'

밥솥 안에서 쌀알이 어떻게 익는가를 예준이에게 수어와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예준이는 내 이야기가 재미있었을까?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이샛별
밥솥 안에서 쌀알이 어떻게 익는가를 예준이에게 수어와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예준이는 내 이야기가 재미있었을까?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이샛별

예준이의 손을 이끌고 밥솥 근처에서 다시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밥솥 안에서 쌀알이 어떻게 익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수어와 몸동작으로 크게, 천천히 예준이의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쌀+서로+안다+따뜻하다+예준이 얼굴 이름+위해+맛있다+변하다+~중”

(수어 단어를 이은 문장 형태입니다.)

예준이는 엄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을까, 아니면 눈으로 보는 이야기에 밥솥 안에서 익어가는 쌀알 냄새가 더 맛있게 느껴졌던 걸까? 엄마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우리 집의 아침 풍경이 늘 이렇지 않지만, 엄마와 아들의 눈 맞춤은 늘 변함없이 계속된다.

*칼럼니스트 이샛별은 경기도농아인협회 미디어접근지원센터에서 농인(=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이는 뉴스를 제작하며, 틈날 때마다 글을 쓴다. 유튜브 ‘달콤살벌 농인부부’ 채널 운영, 다수 매체 인터뷰 출연 등 농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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