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내 임산부 좌석 왜 숨겨놨나?
지하철 내 임산부 좌석 왜 숨겨놨나?
  • 이유주 기자
  • 승인 2014.07.09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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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 앉으면 임산부 엠블럼은 보이지 않아 복지부 "엠블럼보다 시민들의 배려가 중요"

【베이비뉴스 이유주 기자】


"임산부 좌석인지 잘 모르고 그냥 앉게 돼요." 지난 5일 오후 사당에서 오이도 방면으로 가는 지하철 4호선 안. 직장인 김명진(29·서울 동작구·가명) 씨는 자신이 앉은 자리가 임신부 배려석임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김 씨는 "지하철에 사람이 많거나 임산부 좌석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그 자리가 임산부석인지 전혀 모른다. 사람이 없을 때야 비로소 임신부 좌석이 있다는 것을 종종 인식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어 김 씨는 "일반인이 임산부 좌석에 앉으면 눈치가 보일 만큼, 일반인 좌석과 임산부 좌석을 확실히 구분하는 새로운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가 직접 해당 지하철 10량을 둘러본 결과, 임산부 좌석은 모두 일반인들이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가 주는 젤리를 받아먹는 아이부터 스마트폰을 보고 낄낄대는 남학생, 발 밑에 검은 봉지를 한가득 나열한 중년의 아저씨, 노약자석에 앉지 못한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리가 나면 그저 달려가 앉기 바빴다. 결국 이날 임산부 좌석은 정작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종점까지 달렸다.

 

지하철에 설치돼 있는 임신부 배려석에 한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잠을 청하고 있다. 임신부 배려석임을 나타내는 엠블럼은 이 남성의 머리와 등에 가려져 있다. 이기태 기자 likitae@ibabynews.com ⓒ베이비뉴스
지하철에 설치돼 있는 임신부 배려석에 한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잠을 청하고 있다. 임신부 배려석임을 나타내는 엠블럼은 이 남성의 머리와 등에 가려져 있다. 이기태 기자 likitae@ibabynews.com ⓒ베이비뉴스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지하철 1~8호선 열차 1칸당 중앙석 양 끝 2석을 '임산부 배려석'으로 지정하고, 그해 12월부터 본격 운영하기 시작했다. 임신부는 유산의 위험, 입덧과 구토, 피로감 등 신체적·정신적 어려움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경로석이 돼 버린 기존 '교통약자 보호석'을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

 

시는 승객들이 임산부 좌석임을 알아보도록 좌석 상단에 가로·세로 각 30cm의 임산부 엠블럼을 부착하고,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는 초기 임신부를 위해서 임신부임을 알리는 가방고리 엠블럼을 배포하기도 했다. 승객들에게 임산부 엠블럼을 달고 다니는 초기 임신부를 만나면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뜻에서다.
 
하지만 임산부 좌석이 운영된 지 어느덧 10개월, 곧 운영 일년을 바라보는 임산부 좌석은 아직도 일반석에 불과하다. 승객들의 배려심, 적극적이지 못한 홍보 등의 문제도 있겠지만 임산부 좌석이 노약자 좌석처럼 일반석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탓도 있다. 좌석 상단 낮게 부착된 임산부 좌석 엠블럼과 일반석과 같은 색의 의자 시트 등이 승객들의 시선을 확실하게 사로잡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임산부 좌석 엠블럼은 승객이 앉으면 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2010년 국가기술표준원 자료에 따르면 한국 성인 남자의 평균 앉은키는 약 92cm, 여성의 평균 앉은키는 86cm. 하지만 엠블럼이 부착된 높이는 약 54~84cm다. 엠블럼은 성인 앉은키에 비해 훨씬 낮게 부착된 것이다. 임산부 좌석에 누군가 앉았을 경우, 주변 승객들은 해당 좌석이 임산부 좌석인지 쉽게 분간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 임산부는 "임산부 배려석은 잘못 만들어진 것 같다. 사람이 앉아 있으면 스티커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며 "위에서 달랑달랑 내려오는 팻말을 달면 좀 낫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임산부도 "좌석 상단 스티커는 앉으면 보이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임산부에 대한 배려 인식을 주기에는 너무 약하다"며 "반대편에 앉는 사람까지 스티커가 보이도록 크게 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석과 구분되지 않는 의자 색 역시 임산부 좌석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만드는 한 원인이다. 서울메트로의 1~4호선지하철과 서울도시철도 5~8호선 지하철은 일반석과 임산부석 시트가 각 회색, 파란색으로 모두 동일하다. 임신한 아내를 둔 한 남편은 "임산부 좌석에 신경쓰는 사람이 없다"며 "천정과 벽·바닥 등 핑크색으로 만들어 유목성 높였으면 좋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대전지하철의 경우, 임산부 좌석은 초록색의 일반석과 달리 핑크색이다. 단순하게 스티커만 붙여 구분한 기존 임산부 좌석의 한계를 인정하고, 좌석 자체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국내 철도기관 중 최초로 핑크색 좌석을 도입한 것이다. 색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좌석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다.

 

대전지하철의 임산부 좌석은 핑크색이다. 따라서 어느 누가 봐도 이 좌석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전철도공사
대전지하철의 임산부 좌석은 핑크색이다. 따라서 어느 누가 봐도 이 좌석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전철도공사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노약자석에서 밀려나는 임산부들을 위해 따로 임산부 좌석을 만들어 놓았지만, 임산부들은 현재 (엠블럼 위치, 시트 변경 등)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고 있다"며 "지하철은 일반 승객들의 이동 편의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임산부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관계자는 "엠블럼 위치를 많이 고민했지만, 당시 엠블럼을 부착하는 데 도시철도공사가 규정하는 높이가 있었다. 규정선을 무시하고 엠블럼을 부착하는 것은 지하철의 운영 문제 등으로 불가능했다"며 "중요한 것은 승객이 앉았을 때 엠블럼이 가리고 안 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승객들의 배려,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사실 현재 부착된 엠블럼만으로는 임산부 좌석을 확실히 구분짓하기에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엠블럼을 높이려면 광고 액자를 제거해야 하는데, 지하철을 운영하는데 있어 광고 수입도 있어야 하고, 현재 계약된 광고물을 내릴 수도, 광고 계약기간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차라리 보건복지부가 광고를 다 사들여 자리를 마련해준다면, 임산부 엠블럼은 물론 좌석에 관한 홍보글도 충분히 부착할 수 있지만, 복지부가 하는 일이 많은 만큼 예산 부족으로 그 단계까지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며 "대전지하철처럼 핑크색 임산부 좌석 시트도 고민해봤지만, 1량당 시트 교체 비용도 상당히 높아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비용적 측면에서 현재 높이에 엠블럼을 부착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도시철도공사도 현재 임산부 좌석이 잘 운영되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다. 그래서 임산부 배려 캠페인도 지속적으로 진행, 지하철 내 동영상 광고 및 안내 수시 방송 등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며 "시민들의 인식도 개선될 수 있도록 관련 방안을 계속 검토, 논의하는 단계"라고 전했다.

 

최세경 가톨릭의대(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임신부는 대중교통 이용 시 오래 서 있을 경우, 부종이 생기게 되고, 반복 발생 시 심부 정맥혈전증의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무게중심, 근골격계의 변화로 허리 통증이 유발되고, 균형감각 상실로 넘어지게 되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임산부 좌석 표식이 쉽게 가려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임산부 좌석이 있더라도 실제로 임산부들이 잘 이용할 수 없다"며 "표식을 늘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곳에 표식을 해서 바르게 운영되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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