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수린이의 고백, “이모가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다섯 살 수린이의 고백, “이모가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 칼럼니스트 김정은
  • 승인 2018.08.02 15: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그림 엄마글] 말 트임이 늦었던 딸의 그림이야기

다섯 살 수린이는 이모가 좋습니다. 수린이 생일에 이모가 맘에 쏙 드는 선물을 사주었습니다. 마치 수린이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진분홍색 원피스와 굽이 높은 구두, 보석이 박힌 가방을 선물했습니다.

수린이는 늘 네 살 위 언니 옷을 물려받았습니다. 아홉 살 언니는 절대 치마를 입는 법이 없었습니다. 동네 태권왕답게 운동화에 체육복만 입었습니다. 검은 띠를 매고서 돌려차기와 받아 차기를 할 때면 언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멋져 보였지만 언니의 체육복은 싫었습니다. 아주 가끔 언니가 옷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옛날 무술 영화를 보고나서 ‘이소룡 추리닝’을 사달라거나 ‘따다다다다’ 기관총 쏘는 소리가 시끄러운 전쟁 영화를 보고나서 ‘군복’을 입고 싶다고 하는 정도였습니다.

수린이는 언니가 입던 옷을 입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색감을 좋아하는 수린이 취향에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면 옷장을 다 뒤집어놓고 엉엉 울기 일쑤였습니다. 맘에 드는 옷이 없다며 울고불고하는 수린이를 위해, 엄마는 온 동네 언니들이 입다가 작아져서 못 입는 옷을 상자 째 얻어오곤 했습니다.

“수린아, 이 옷 좀 봐봐! 완전 새 옷이다. 그치?”

수린이는 매일 체육복만 입는 언니보다 헌 옷을 받아오는 엄마가 더 미웠습니다. 옷 때문에 점점 고집쟁이에 울보가 되어가던 어느 날, 엄마는 드디어 수린이 옷을 사러 시장에 갔습니다.

오늘처럼 햇볕이 내리쬐던 여름 날, 아홉 살 수민이와 다섯 살 수린이를 데리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남대문 시장에 갔습니다. 무더위에 지친 세 모녀는 시장을 둘러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곧장 시장 초입에 있는 첫 번째 아동복 매장으로 들어가 가장 시원해 보이는 원피스를 한 벌 골랐습니다. 수린이 몸에 대보고 사이즈가 맞는지 얼추 확인한 다음 색깔 별로 다섯 장을 샀습니다. 어린이집에 가는 월, 화, 수, 목, 금요일에 매일 다른 색깔 원피스를 입히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모는 달랐습니다. 수린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네 시간이나 구경을 했답니다. 구두 전체에 보석이 박혀 있고 굽까지 높은 유아용 구두를 찾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백화점에 있는 구두 매장을 죄다 들어가서 수린이가 꿈에도 그리던 구두를 찾았습니다. 이 옷 저 옷 원 없이 입어보고 가장 맘에 드는 원피스를 한 벌 골랐습니다. 이 가방 저 가방 다 들어보고 까만색 에나멜 바탕에 드문드문 보석이 박혀 밤하늘에 별이 떠 있는 것 같은 가방을 골랐습니다. 이모는 단 한번도 “이제 그만 가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수린이가 맘에 쏙 드는 걸 고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습니다.       

해바라기(5세 그림). ©유수린
해바라기(5세 그림). ©유수린

어린이집에서 ‘여름’하면 떠오르는 것을 그려 보라고 했답니다. 수린이는 여름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여름하면 가장 먼저 ‘생일’이 떠올랐고, ‘생일’하면 다섯 살 생일에 맘에 쏙 드는 선물을 해주었던 ‘이모’가 떠올랐답니다. 이모를 그리려고 했지만 다섯 살 수린이가 이모를 잘 그리기란 쉽지 않았기에 이모를 대신해 꽃을 그렸답니다.

사자가 갈퀴를 세운 듯 이글이글 붙타는 해님 아래, 해님을 빼닮은 해바라기 두 송이가 서 있습니다. 키가 큰 해바라기는 이모 해바라기이고 키가 작은 해바라기는 수린이 해바라기입니다. 햇살이 눈부시던 수린이의 다섯 살 생일 날, 이모와 수린이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린이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걷고 수린이 눈높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이모가 참 좋습니다. 수린이는 엄마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가끔(아니, 자주) 이모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여태 ‘해바라기’ 그림을 볼 때마다 한 송이는 ‘엄마 해바라기’, 다른 한 송이는 ‘수린이 해바라기’라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습니다. 키 큰 해바라기가 이모 해바라기, 키 작은 해바라기가 수린이 해바라기였다니...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다니... 엄마라서, 모녀 사이라고해서, 딸이 무조건 엄마를 좋아해줄 리 없는데... 제가 너무 방심했나 봅니다. 이제라도 수린이 맘에 쏙 드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칼럼니스트 김정은은 글 쓰는 엄마입니다. 다년간 온가족이 함께 책을 읽은 경험을 담은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2016)과 엄마와 두 딸의 목소리를 담은 「엄마의 글쓰기」(2017)를 썼습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베이비뉴스는 창간 때부터 클린광고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언론으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뉴스는 앞으로도 기사 읽는데 불편한 광고는 싣지 않겠습니다.
베이비뉴스는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대안언론입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에 동참해주세요. 여러분의 기사후원 참여는 아름다운 나비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베이비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관련기사

베이비뉴스와 친구해요!

많이 본 베이비뉴스
실시간 댓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8 경찰공제회 자람빌딩 B1
  • 대표전화 : 02-3443-3346
  • 팩스 : 02-3443-3347
  • 맘스클래스문의 : 1599-0535
  • 이메일 : pr@ibabynews.com
  • 법인명: 베이컨(주)
  • 사업자등록번호 : ​211-88-48112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 01331
  • 등록(발행)일 : 2010-08-20
  • 발행·편집인 : 소장섭
  • 저작권자 ©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인정보보호 배상책임보험가입(10억원보상한도, 소프트웨어공제조합)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유미 실장
  • Copyright © 2024 베이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ibaby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