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한 번도 이북(E-book)을 본 적이 없다. 책은 책장을 넘기는 맛이지. 게다가 기억하고 싶은 문장마다(다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밑줄 긋는 재미는 또 어떻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고, 밑줄 그은 내용 보고 좋았던 부분 다시 음미하고… 이 맛에 책 읽는 거 아닌가?
그런데 베트남 한 달 살기 오면서 책은 딱 한 권 챙겼다. 그마저도 내 취향의 책은 아니었다. 그저 인생에 꼭 한번은 읽어야 할 고전이라고 해서 챙기며 이번에는 기필코 완독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웬일…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당최 읽히지가 않았다. 책 읽는 재미에 빠지고 싶은데 읽히지 않으니 재미가 없었다. 마음은 책을 갈구하고 있는데 손에 잡히는 책이 없었다.
아, 이래서 광고가 무섭다. 그때 생각난 게 이북 업체 광고였다. 앱만 다운로드하면 보고 싶은 책을 볼 수 있었다. 음악 앱처럼 골라 듣기, 아니 골라 보기가 가능한 거다. 광고에서는 가입만 하면 무려 한 달이나 무료로 책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사놓고 보지 못한 책이 보였다.
「라틴어 수업」(한동일, 흐름출판, 2017) 이걸 봐야지. 이북 다운로드하는 데 몇 분도 안 걸렸다. 책을 읽는 데는 삼 일도 걸리지 않았다. 갈증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문장을 읽을수록 없던 생각이 깊어졌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얼마 전 떠난 제주 여행에서도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책 한 권 챙기지 못했는데 시간 공백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읽을 게 당겼다. 뭐든 읽고 싶었다. 아쉽게도 숙소 근처에는 서점도, 읽을 만한 책도 없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아, 책 한 권 가져올 걸. 그게 뭐라고' 그때는 이북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이북을 보게 될 줄이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애를 낳은 후로는 종이책보다 이북을 더 자주 본다는 후배들 말이 생각났다. 책은 부피와 무게를 차지해서 들고 다니기 힘들다는 거였다. 애가 어리면 책이 훼손 되는 경우도 많고. 그에 반해 핸드폰은 거의 대부분 손에 있으니까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도 '그래도 책은 책이지…'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이젠 여행 때마다 이북을 볼 것 같은 예감이다.
이북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고, 밑줄도 그을 수 있고, 생각을 정리해서 메모로 남겨 놓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구간이든 신간이든 원하는 책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써 놓고 보니 굳이 단점을 못 찾겠다. 글을 쓰는 내 입장에서는 메모해 둔 것만 봐도 어떤 흐름으로 글을 정리할지도 한눈에 보이더라.
이북 한 권 값이나, 종이책 한 권 값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게 좀 부담이었는데 음악 한 달 듣기 하는 것처럼 월정액을 내고 빌려보는 서비스는 소비자 입장에서도 효율적이지 않나 싶다. 그렇게 읽고 소장하고 싶은 책은 또 구입하면 되니까. 아이들을 재우고 오늘도 읽고 싶은 책을 깊이 읽는다. 책을 읽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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