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아이와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아이의 컨디션을 고려해 비행시간이 비교적 짧은 동남아 국가를 선택했고, 그곳은 자국어와 영어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나라였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비교적 시내와 동떨어진 곳이어서 아시아계 관광객들보다는 서양인들이 특히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객실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모든 대화가 영어로 들려왔다.
'영어를 글로 배운', 전형적인 90년대식 영어 교육을 받은 신랑과 나는 입에 말이 맴돌아도 선뜻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낯선 외국인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괜히 먼저 딴청을 피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 막 말하는 것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네 살 아이에게는 외국인의 파란 눈, 노란 머리 같은 것이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나 보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안녕하세요!” 혹은 “Hello!”라는 인사를 외치며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우리는 그런 당당함이 부럽기까지 했다.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외부 강사를 초빙해 영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집에서는 영어로 나오는 TV 애니메이션과 동요를 들려주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아이는 몇 가지 단어와 함께 인사나 감탄사 등을 영어로 말하곤 한다.
결코 우리 아이가 언어에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뛰어나다는 얘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 또래 친구들 대부분 그 정도는 영어로 말할 수 있다. 좀 더 잘하는 아이들은 정확한 발음으로 영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물론 질문과 대답, 즉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자연스러울 정도다.
말로만 들었는데 요즘 애들, 정말 빨라도 너무 빠르다. 내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이미 다양한 환경에서 영어에 노출되고 있다. 내 주변에도 어린이집 대신에 ‘놀이학교’를 보내는 엄마들이 늘어나고 있다.
‘놀이학교’는 아이를 보육하고 식사도 제공하며 일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어린이집, 유치원과 비슷하다. 하지만 소수 정예의 학생을 대상으로 시설 등 환경이 좀 더 양호하고 차량 운행과 같은 편의도 제공되며 수업 대부분이 영어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특히 다르다.
그래서 엄마들 사이에서는 영어유치원을 보내기 위한 전 단계로 놀이학교를 선행학습처럼 보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영어유치원도 마찬가지지만, 국가에서 인정한 정식 보육 기관이 아닌, 사립 교육 기관이어서 나라에서 지원하는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놀이학교에 보내면 가정 보육으로 간주되어 부모에게 소정의 보육 지원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일반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과 비용은 천지 차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놀이학교나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는 싶지만 수업료가 만만치 않아 포기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최근 동네에 새로 생긴 북유럽식 교육 기관은(놀이학교와 비슷한 어학원 개념) 일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보다 수업료가 3~4배 더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자녀의 올바른 성장이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가 되어보니 내 아이에게 좋다는 것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만 아이의 영어 교육에 있어 너무 느긋하게 생각해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마저 들었다.
조식만큼은 숙소에서 정해 놓은 시간이 있다. 그래서 조식시간은 숙소에 묵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부분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아 국적을 불문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식사 시간을 갖는다. 서로의 언어를 잘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부모들이 자녀에게 좀 더 좋은 것을 더 먹이고자 하는 마음은 한결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밥보다 먼저 달콤한 디저트 코너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더라.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결국 초콜릿이나 젤리 등을 손에 쥔 아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이었다. 오후에는 그 아이들과 함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수영도 즐겼다. 같이 웃고 즐기고 헤어짐을 아쉬워하기까지 언어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놀이학교나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일찍 영어를 배워 능숙하게 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하나의 수단으로 삼아 세계를 무대로 배우고 성장하길 원하는 마음이었다. 영어를 잘하면 소통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제 막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있고, 나와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를 쓰는 친구도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아이들 간의 소통에는 언어보다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아마 어른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마음 혹은 진심 같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대한민국 엄마 중 한 사람으로서 영어 교육에 대한 욕심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호기심을 가지고 필요로 할 때까지 기꺼이 즐겁게 기다려볼 생각이다.
*칼럼니스트 여상미는 이화여자대학교 언론홍보학 석사를 수료했고 아이의 엄마가 되기 전까지 언론기관과 기업 등에서 주로 시사·교양 부문 글쓰기에 전념해왔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아이와 함께 세상에 다시 태어난 심정으로 육아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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