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세계모유수유주간을 맞아 인구보건복지협회와 서울시,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공동주최로 지난 1일 오후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 여성플라자 아트홀에서 열린 기념 연합행사에서 ‘어려운 환경에서의 모유수유 성공사례’ 공모전 우수작품으로 선정된 수기 전문을 공개한다.
보통의 평범한 여느 엄마들과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의 오른쪽이 모두 혈관기형으로 덮여 피부가 붉고, 보통 얼굴의 한배 반 이상 부풀어져 기형적인 얼굴로 태어난 안면장애 3급의 장애인이다.
흔히들 나를 보는 사람들은 ‘선풍기 아줌마’라고 말하거나, 화상 장애인이라는 오해를 하거나, 아니면 큰 혹이 있어 그냥 수술하면 된다고 쉽게들 말한다.
이제껏 가장 많이 들어본 이야기는 “왜! 수술 하지 않는가?”, “방송 출연하면 수술시켜 준다더라”, “그 얼굴로 사회생활이나 결혼은 할 수 있겠는가?” 등등 얼굴의 장애로 인해 무수히 많은 걱정의 말들과 불편한 시선들을 받으며 살아 왔다.
20대에 몇 차례 수술도 했지만 그때마다 혈관기형으로 인해 멈추지 않는 출혈 때문에 목숨에도 치명적인 난치성질환으로 수술 이후 재발도 아주 심해 꾸준히 지속적인 수술이 필요한 상태이다.
나 스스로도 이 세상에 한 여자로 태어나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서 아이도 낳아보고 싶은 욕심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늘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35살 늦은 나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 해 11월 내 생애 잊지 못할 첫 출산을 하였다.
아이를 갖기 위해서 포기해야 했던 일이 생각난다. 얼굴 수술을 위해 수술 중 출혈을 최소한 줄일 수 있는 알코올 경화요법을 1년 이상 준비하면서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고, 막상 수술 날짜를 정하기 위해 의사와 상담 하던 중, 수술을 하면 지금 얼굴의 70% 이상은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앞으로 수술을 시작하면 약물이 너무 독하기 때문에 향후 최소 5년에서 길게는 10년 넘게 임신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얼굴 수술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얘기는 이제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결혼한 나에게나 남편에게 치명적인 말이었다.
남편은 내가 좋으면 수술 할 것을 권했지만, 아이를 너무 갖고 싶은 난 그 동안의 고생들을 눈물로 포기하고 임신을 선택 하였다.
어느덧 출산 예정일을 일주일 앞두고 유도 분만으로 출산하려 하였으나 생각보다 자궁이 쉽게 열리지 않아 하루 반나절 고생하다 제왕절개로 3.13kg의 건강한 남자 아이를 출산하였다. 얼굴 때문에 전신마취가 힘들어 척추에 부분마취로 출산을 하였기에 출산 후 바로 아들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항상 나만 보면 건강하지 못한 딸을 낳은 것이 마치 당신의 죄 인양 늘 뒤에서 숨죽여 눈물 흘리시던 엄마에게 건강한 손자 한명 낳아 드리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룬 것 같아 너무나 가슴이 벅차 눈물이 마구 흘러 나왔다.
이틀 동안 너무 고생한 나머지 얼굴은 거의 두 배 이상 부풀어 전혀 사람의 얼굴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보면 무서운 모습에 눈은 퉁퉁 부었고, 돌아간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가 태어나면 아기 건강과 산모 건강에 좋은 완전 모유수유를 꼭 하겠다고 결심 했기에 몇 시간 후 간호사가 아들을 병실로 데려와 나의 가슴에 올려놓아 주었다. 신기하게도 아직 젖이 돌지 않았지만 아들은 젖을 빨려고 젖꼭지를 깨물었다.
그때 엄마로서 느끼는 그 짜릿한 기분 아마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아주 특별하고 인생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틀째부터 젖이 돌기 시작하면서 출산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가슴이 뭉치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마사지를 해준다 해도 점점 더 가슴이 딱딱해져 돌덩이처럼 굳어져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기 두뇌에 좋다는 초유를 짜기 위해 유축기로 젖을 짜는 순간 젖꼭지가 찢어지는 고통이었지만, 내 아이가 초유를 먹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란다는 생각에 꾹! 참고 최대한 많은 초유를 짜고 싶었으나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수유를 하기 위해 2시간 마다 신생아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고통도 많이 따랐다. 얼굴의 장애 때문에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몸은 급격히 면역력이 떨어져 얼굴 피부에 상처가 점점 더 커졌고, 손이 닿기만 해도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두통도 너무 심해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겨웠고, 입안의 피부 점막들이 다 벗겨져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젖도 잘 돌지 않았고 회복도 잘 되지 않았다.
신생아실에서 다른 아기 엄마들과 수유하는 것이 민망했던 적이 많았다. 평소에 아픈 얼굴의 오른쪽 코는 비염이 심해 고개만 숙이면 쉴 새 없이 콧물이 줄줄 흘러 내려 코를 휴지로 막지 않으면 수유 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닌 콧물 닦는데 신경이 더 쓰였고, 돌아간 입 때문에 침도 줄줄 흘러 거즈 손수건을 입에 꽉 물고 수유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내가 봐도 이상한데 지나고 나서 친정엄마 하시던 말씀이 “그래도 엄마라고 자기 자식 배고플까봐 젖 주려고 한 손에는 휴지통 끼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손수건 들고 가는 모습이 어찌나 처량하면서도 웃겼는지!”라고 말씀 하신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한쪽 젖꼭지가 밖으로 많이 나와 있지 않아 아들은 설소대도 짧고 빠는 힘이 약해서 젖을 빨 때마다 배는 고픈데 젖이 나오지 않아 얼마나 우는지! 초보 엄마인 나도 속상해서 함께 눈물도 많이 흘렸다.
퇴원 이후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면서도 아이가 젖을 잘 빨지 못하니 2시간마다 젖을 물려도 만족하지 못했고, 밤이고 낮이고 젖 달라고 칭얼칭얼 거렸고, 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얼굴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설상가상 아픈 얼굴은 상처가 너무 커지고 진통이 심해져 진통제를 먹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으나 수유하는 동안은 약을 먹을 수 없어 아기를 낳았다는 행복함보다 고통을 참기에 바빴다.
지금에서야 웃으면서 회상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엄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엄마라는 존재는 참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젖몸살에 끙끙 앓던 시간들도 어느덧 아이가 백일이 지나면서 젖이 잘 돌기 시작하였고, 젖양도 엄청 많아서 아이도 젖 빠는 힘이 점점 생겨서 수유가 편해졌다. 아들은 혼자서도 누워있는 엄마에게 기어와 젖을 빨고, 놀다가도 빨았다. 자주 젖을 빨다보니 피곤하고 귀찮을 법도 하였지만 아이가 배 위에 올라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젖을 빠는 동안 서로의 눈빛을 교감하는 일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13개월 동안 완전 모유수유를 하면서 아이는 큰 병치레 없이 입원 한번 한적 없이 잘 자라 주었다.
흔히들 세상 사람들은 하기 좋은 말로 무슨 장애인이 혼자도 힘든데 그런 몸으로 아이를 낳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어느 누구만 될 수 있는 특권이 아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유수유도 처음에는 많이 힘들지만 아기와 엄마가 건강해지는 척도는 바로 모유수유이고, 모유수유를 통해 아기는 엄마 품속에서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더 없이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건강한 아이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둘째 딸아이를 임신 중이다. 올해 11월이면 또 출산을 하고 둘째 아이 역시 완전한 모유수유로 건강하게 키울 것이다.
내 아이가 건강해지는 비법은 바로, 엄마 젖 최고! ^^~~
엄마가 된다는 것.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과 더불어 많은 경험과 기회를 주시고,
응원의 댓글까지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아이의 눈높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