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결정권은 ‘운명결정권’… 발달장애아에겐 왜 가르치지 않나
자기결정권은 ‘운명결정권’… 발달장애아에겐 왜 가르치지 않나
  • 칼럼니스트 박현주
  • 승인 2020.08.2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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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꿈을 꾸는 아이] 유아기 발달장애아의 자기결정권⓵

처음 어린이집을 만들고, 2012년 장애통합시설로 전환하려 시설 정비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그때 법이 참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자폐성 장애아와 지적장애아가 대부분입니다. 뇌 병변을 중복으로 가진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발달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시설을 변경하려고 하니 점자 블록, 경사로, 보조 손잡이, 장애인용 화장실 같은 게 있어야 한답니다. 사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시설설비엔 특별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발달장애아에게는 픽토그램 안내판이나, 화장실 이용 순서 같은 것들이 필요한데, 이런 건 의무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점자 안내판, 블록 같은 것들, 물론 있어야 마땅한 시설이나 좀 이상하다고 느껴서 관련 법을 뒤져보니, 역시 발달장애인을 위한 법은 없더군요. 그때만 해도 발달장애인 관련 법이 없었습니다. 2014년이 되어서야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2015년부터 시행됐거든요.

이 법을 만들기 위해 발달장애인 부모 단체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등 당사자가 자기 권익을 외쳐온 것과 달리 발달장애인의 운동은 이 부모들의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모에 의해 법이 만들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장애인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발달장애인이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베이비뉴스
장애인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발달장애인이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베이비뉴스

발달장애인을 중심으로 ‘피플 퍼스트(People First)’ 운동이 일어나고, ‘자기주장대회’라는 것을 통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이 운동이 우리나라에 등장할 무렵, 유튜브를 통해 영국의 다운증후군 장애인이 자기주장대회에 나와 ‘임신 중 다운증후군 유산 합법화’에 반대하는 연설을 듣게 됩니다. 

다운증후군이라고 유산을 합법화한다면 다운증후군은 죽어도 된다는 말이냐, 나는 나를 사랑한다. 우리 가족은 나를 사랑한다. 다운증후군 아이들도 살 기회를 똑같이 줘야 한다…. 이런 내용이 핵심이 되는 연설이었습니다. 감명 깊었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들의 ‘자기주장’은 ‘자기결정권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자기결정권, 어렵지만 쉬운 단어입니다. 헌법에선 자기결정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기결정권(自己決定權)이란 대한민국 헌법상의 권리로 국가권력으로부터 간섭 없이 일정한 사적 사항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의적 권리를 의미한다. 자기결정권의 근거로는 헌법 제10조가 보장하고 있는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전제된 개인의 자기운명결정권이다.’

◇ 장애와 관계없이 ‘자기결정권’은 어릴 때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장애인들에게도 자기결정권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한 말처럼 들리나요? 그런데, 모든 것이 미숙해 보이는 발달장애인들에게 자기결정권을 부여한다면 정말 삶의 질이 좋아질까요? 발달장애아가 성인이 되었다고 ‘자기결정권’이 딱 주어진다면 이들은 이렇게 주어진 ‘자기결정권’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요?

발달장애인이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습관’이 돼야 ‘스스로 알 수 있는 내 권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유튜브에 나오는 다운증후군 소녀처럼 멋지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유아기엔 사실 자기주장이 없는 아이들이 사랑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추운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아침부터 샌들을 신고 등원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샌들을 신겨 어린이집에 보냈습니다. 그 덕에 겨울 산에 가기로 했던 야외 학습은 취소됐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부모를 원망하는 말을 쏟아냅니다. 하원 길에 만난 부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었어요.”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판단력이 아직 미숙한 유아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무한히 제공해 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등원하거나, 여름에 겨울 부츠를 신고 오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해주는 것이 아이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특히 안전과 건강과 관련한 아이의 ‘자기 결정’은 무조건 옹호해선 안 됩니다. 그렇다면 유아기 자기결정권은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 유아들이 그 시기에 겪어야 하는 자기결정권 기초 연습엔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무엇보다 ‘스스로 선택한 것에 책임지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사례처럼 더위와 추위, 계절의 특성을 모르는 아이에게 무한 선택권을 주는 것도 자기결정권에 대한 연습일까요?

아닙니다. 유아기의 판단 수준에 맞추어 점점 키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아기의 자기결정권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책임질 수 있는 두 가지의 경우부터 제공하면 됩니다. 사과 그림을 칠할 때, 아이 손에 빨간색을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초록색과 빨간색 두 가지를 제공하고 “어떤 색 사과를 만들고 싶니? 네가 고른 색으로 해보자”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 자기결정권 연습의 시작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른 말 잘 듣는 아이라면 키우기야 편하겠지만,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 '인간 다운 삶'과는 좀 거리가 멀어지겠지요. 자기결정권은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베이비뉴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른 말 잘 듣는 아이라면 키우기야 편하겠지만,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 '인간 다운 삶'과는 좀 거리가 멀어지겠지요. 자기결정권은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베이비뉴스

위에서 언급한, 겨울에 샌들 신고 어린이집에 온 아이의 사례에선 어떻게 적용하면 될까요? 이럴 땐 아이에게 부츠와 운동화 두 가지로 정리해 아이에게 제공하고 “어떤 신발을 신을까? 네가 고른 것을 신고 가보자”라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옷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죠. 산에 가는 날 “원피스를 입고 갈까, 바지를 입고 갈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색의 바지를 입을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즉, 아이가 어릴 땐 선택의 폭을 부모나 교사가 조금 제한하고, 판단력이 향상되면 그에 맞춰 선택의 폭을 확장하면 됩니다. 발달 장애아이들에겐 이런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장과 가정에선 이런 선택의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차려주는 밥상, 부모가 골라주는 옷, 부모가 이야기하는 스타일로 머리를 정리하는 일.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사가 쥐여주는 크레파스, 교사가 먹여주는 반찬, 교사가 정해놓은 학습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이렇게 하는 게 편할 수 있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이’는 키우기 훨씬 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컸다면 어떨까요? 물론 성인이 되었어도 말 잘 듣는 성인이 훨씬 돌보기에 편합니다. 하지만 당사자의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멀겠지요. 자기결정권은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발달장애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고, 공감을 얻는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내 권리’를 찾는 ‘연습’을 해왔기 때문 아닐까요? 

*칼럼니스트 박현주는 유아특수교육을 전공해 특수학교에서 근무했다. 결혼과 출산을 겪으면서, 내 아이를 함께 키우고 싶어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됐다. 화성시에서 장애통합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부모님들과 함께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데 동참해, 현재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에서 장애영유아 발달상담도 함께 하고 있다. 다양한 아이들을 키우는 일, 육아에서 시작해 아이들의 삶까지, 긴 호흡으로 함께 걸음으로 서로의 고민을 풀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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