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도 똑같네, 양육자에게 필요한 건 돈과 시간
영국도 똑같네, 양육자에게 필요한 건 돈과 시간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1.07.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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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미안해요, 리키’ (2019)

나는 죽어라 열심히 살았는데 청소년 자녀가 엄마가 그것밖에 되지 못한 건 엄마의 선택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마음일까? 통상 택배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로 알려진 「미안해요, 리키」(2019)은 양육자인 내게 사춘기 자녀와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는 부모의 고군분투기로 다가왔다.

단란했던 리키 가족. 리키가 택배 노동을 시작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영화사진진
단란했던 리키 가족. 리키가 택배 노동을 시작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영화사진진

금융위기의 여파로 건축 회사에서 해고된 리키는 온갖 건축 현장을 전전하고 무덤 파는 일까지 했지만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월세살이를 벗어날 길이 요원해 보인다.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말에 택배 노동 현장에 뛰어든 리키. 소변 볼 시간도 없어서 소변 통을 밴에 챙겨 가지고 다니고, 2분만 쉬어도 택배 위치 추적 기계가 삐삐 울려댄다. 물건을 배송한 만큼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날마다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겨우 택배 차량 대출금을 갚고 생활비를 벌 수 있다. 나중엔 급기야 꾸벅꾸벅 졸면서 택배를 배달한다.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이 살얼음판인 상황인데, 아들 세바스찬이 등교를 거부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사고를 친다. 아들 세바스찬과 딸 라이자가 자기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리키. 그는 아들에게 불을 토해내듯이 말한다.

“거지같은 일을 전전하며 14시간씩 일하고 남 뒤치다꺼리나 하다 보면 결국 종놈이 돼.”

“종놈? 아빠가 선택한 거잖아. 주어진 게 아니라 아빠 스스로 된 거야.”

“난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거론 부족한가 보지.”

세바스찬 이놈아, 너 아니어도 아빠 힘들다. 사고 치지 마! ⓒ영화사진진
세바스찬 이놈아, 너 아니어도 아빠 힘들다. ⓒ영화사진진

이제 나도 기성세대가 다 됐나 보다. ‘후아, 저 자식 어떻게 저렇게 아빠 가슴에 쾅쾅쾅 대못을 박냐’며 한숨이 절로 나오고, 리키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됐다.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게 내가 선택한 거라고? 나의 최선이 자식인 네게는 부족하다고?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을 자식이 통째로 부정한다면,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다.

그렇다고 세바스찬이 완전 망할 자식(!)인 것은 아니다. 세바스찬의 반항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대학에 가면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부모의 말에 차갑게 응수한다.

“대학 가면, 하푼 형처럼 5만 7000파운드 빚지고 콜센터에서 일하고 현실을 잊기 위해 주말마다 취하라고?”

세바스찬도 나름대로 앞길에 희망이 보이지 않아 몸부림치고 있다. ⓒ영화사진진
세바스찬도 나름대로 앞길에 희망이 보이지 않아 몸부림치고 있다. ⓒ영화사진진

대학 등록금은 노동자 계층의 자녀가 자력으로 부담하기에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렸고, 부모의 재정적 지원 없이는 대학에 간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나질 않는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쉽사리 중산층에 진입할 수 있는 시대는 저물었다. 세바스찬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간파한 것이다, 현재 이 사회에서는 자신이 오를 수 있는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 명민한 청소년 세바스찬에게 오지랖 넓게 아버지 리키를 위한 변호를 해 볼까. 세바스찬이 벌써부터 사회의 높은 벽에 부딪친 것처럼, 리키가 ‘종놈’으로 사는 것도 세바스찬이 부딪친 것과 똑같은 사회의 벽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소변 볼 시간도 없이 뛰어다니면서 택배를 배달하는 리키. ⓒ영화사진진
소변 볼 시간도 없이 뛰어다니면서 택배를 배달하는 리키. ⓒ영화사진진

필요할 때만 사람을 쓰기 위해 회사는 택배 기사들에게 ‘개인 사업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표를 붙이고 고정 임금을 주지 않는다.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유혹하지만 그건 인간적인 생활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소득이다. (한국 택배 노동자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영화를 보면 영국이든 한국이든 60여 년 전 평화 시장에서 12시간 넘게 일하던 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과 지금, 무엇이 그렇게 크게 달라진 건지 의문이 든다.)

점점 더 냉혹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의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다.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노동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임시직, 단기 계약직 등 불안정한 일자리만이 한없이 자가 증식한다. 자본주의는 점점 노동자들의 정당한 몫을 교묘하게 빼앗아가는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요양 보호사로 하루종일 일하면서 이동 시간 짬짬이 아이들까지 챙기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엄마, 애비. ⓒ영화사진진
요양 보호사로 하루 종일 일하면서 이동 시간 짬짬이 아이들까지 챙기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엄마, 애비. ⓒ영화사진진

그러므로 리키는 특별히 노력이 모자라서 아들 보기에 부족하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세바스찬이 아버지를 단순히 ‘능력 없는 실패자’로 보지 않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 갇힌 개인’으로 봤다면, ‘종놈’의 삶은 당신 스스로 선택한 거라고 단정 짓지 못했을 것이다. 말이 심해서 ‘종놈’일 뿐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아니라면 대부분 피고용자의 위치 아닌가. 집에서 하는 돌봄 및 가사 노동까지 포함하여, 대부분의 부모는 노동자다.

리키와 애비는 세바스찬이 사고를 쳐서 내야 하는 벌금에 벌벌 떨고, 아들에게 비싼 외투를 사 주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한다. 그러나 부부가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어진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부모에게 사고뭉치 아들과 마주앉아 이야기하며 마음을 나누는 건 사치다.

네 가족이 한 데 모여 행복한 장면은 이 장면이 유일하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리키 가족. ⓒ영화사진진
네 가족이 한데 모여 행복한 장면은 이 장면이 유일하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리키 가족. ⓒ영화사진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영국이든 한국이든, 청소년기 자녀든 유아기 자녀든, 양육에 가장 필요한 것은 똑같았다. 양육자에겐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리키의 회사는 잔인하리만치 돈과 시간을 맞바꾼다. 리키는 아들이 절도 사건으로 경찰서에 있다는 전화를 받고도 ‘정확 배송’ 시간을 지키기 위해 달려갈까 말까 눈치를 봐야 한다. 자녀들과 잘 살고 싶어서 돈을 버는데, 돈을 벌려면 기본적인 양육에 드는 시간마저 포기해야 한다.

교통 사고 처리를 위한 두 시간도 빼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 멀로니. ⓒ영화사진진
교통 사고 처리를 위한 두 시간도 빼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 멀로니. ⓒ영화사진진

택배 기사 관리자 멀로니는 아들 일로 며칠만 휴가를 달라는 리키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말한다. “지난주엔 어떤 직원이 딸이 자살을 시도했다고 찾아왔어. 가정이란 언젠가는 문제가 생기게 돼 있어. 쉬고 싶어? 하루에 100파운드 낼 거면 쉬어.” 자본주의가 사람의 얼굴을 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한 사람의 치열하고 사연 많은 삶을 하루치 100파운드로 계산해내는, 그리고 그 계산을 아무 감정 없이, 사무적으로 해내는 얼굴.

영화를 본 다음날, “택배 문 앞에 두었습니다”라는 택배 기사님의 문자를 받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문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나 또한 이 무감한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돈과 시간이 필요한 양육자 겸 노동자다. 실시간 배송 정보 조회 지도에 뜨는 점 뒤에, 사람이 있었다. 이 문자 뒤에도, 어떤 노동자의 ‘삶’이 있을 것이었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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