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 정가영 기자】
브라질 월드컵이 한창이던 지난달 말, 광명시 하안동 A아파트에 거주하는 박아무개(39) 씨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내에 위치한 미니축구장을 찾아 축구를 하려는 순간, 아파트 경비원으로부터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제지를 받았다. 경비원이 “아파트 앞 동에서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기 때문에 축구를 할 수 없다”고 설명하며 축구를 그만 둘 것을 요구해 온 것이다.
박 씨는 “아이들이 축구하려고 힘들게 이곳까지 왔으니 잠깐이라도 하고 가면 안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지만, 다른 경비원까지 달려와 “이곳에서는 시끄럽기 때문에 축구를 할 수 없다"고 재차 제지했다. 결국 박 씨는 풀죽은 아이들을 데리고 축구장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내 운동시설에 축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도 공을 차는 아이들 때문에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예 축구를 하지 못하게 규정을 만든 아파트가 논란이 되고 있다. 축구골대까지 설치돼 있는 엄연한 미니 축구장이지만, 소음을 만든다는 이유로 축구가 금지되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박 씨는 “저녁 늦은 시간이라면 이해하지만, 오후 2시 사람들이 제일 왕래하는 시간에 축구를 한다는 것인데, 한창 뛰어노는 아이들을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라는 것이냐”며 “아이들은 ‘왜 축구장이 있는데도 축구를 할 수 없나요’라고 계속 물어보는데,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기자가 직접 문제의 아파트를 찾아가보니, 아파트 두 동 사이에 위치한 운동시설은 미니 축구 골대가 세워져 있고, 바닥에 인조잔디가 깔려 있어 아이들이 축구 게임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아이들이 야구놀이를 하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어른 키 높이에 맞춘 농구대도 세워져 있었고, 공간이 넓어 배드민턴 등의 운동도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어른이든, 아이이든 이곳에서는 축구나 야구를 할 수 없다. 2010년 하반기 입주자 대표단이 구성되면서 입주자들의 소음 피해를 막기 위해 운동시설에서의 축구, 야구를 금지하는 내용을 의결했기 때문이다. 이에 해당 운동시설의 목재 펜스 위에 설치된 ‘주민 운동시설 운영안내’ 표지판에는 이용시간(10시~18시)과 함께 ‘이곳에서는 축구, 야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내용이 적혀 있다. 아울러 ‘이웃 세대에게 소음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용하시고 특히 이용시간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은 오로지 농구와 족구 뿐이다. 두 종목이 그나마 소음이 덜하다는 이유에서다. 아파트 경비원들은 지속적인 단속을 통해 축구, 야구를 하는 아이들을 쫓아내고 있다. 한 경비원은 “아이들 마음대로 놀게 해주면 좋겠지만, 공이 나무(펜스)에 부딪히며 내는 쾅하는 소리, 아이들 고함지르는 소리가 계속 들리면 근처 세대에서 시끄럽다고 민원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이 경비원은 “작은 아이들은 덜 하지만, 중·고등학생들이 하면 많이 시끄럽다. 또 타 단지 아이들까지 와서 하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된다”며 “전에는 축구하려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계속 단속해서 그런지 요즘에는 많이 안 온다”고 전했다.
하지만 놀고 싶은 아이들이나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는 버젓이 축구 골대까지 설치돼 있는 시설을 이용할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특히 축구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놀이인데, 일정 시간을 정해서 하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하지 말라고 막아서니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소리가 소음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반응이다.
박 씨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줄어드는 현 시대의 자녀를 가진 부모 입장에서 안타깝고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한다면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지 않겠느냐. 아이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놀이문화가 많이 확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파트 관리팀 측에서는 주민들이 합의해 정한 규정이기 때문에 그에 맞게 관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아파트 관리팀 관계자는 “방학 때만 되면 ‘축구를 어디서 하느냐’는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데, 우리는 정해진 규정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며 “어린 아이들에게는 경로당 앞에 노인들을 위해 설치한 게이트볼장에서 놀도록 안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아파트 내에서는 소음 때문에 다양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살인사건까지 발생하게 만드는 층간소음이 대표적이지만, 공론화되지 않은 소음갈등도 적지 않다. 거의 대부분의 갈등은 뛰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은 아이들과 관련한 것들이다.
공동주택생활소음관리협회 차상곤 협회장은 “아이들이 놀면서 발생하는 소음과 관련한 문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어올 때가 있다. 문의를 해오는 경우는 공부하는 중·고등학생이 있는 가정이 대부분”이라며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음은 예민한 부분이긴 한데, 층간소음처럼 많진 않다”고 말했다.
아파트를 고를 때 집안 인테리어 외에도 아파트 내에 설치된 시설이나 환경이 중요시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특히 운동시설이나 놀이시설들도 보다 다양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주민들이 조용하게 거주할 권리와 아이들이 놀 권리의 충돌도 더욱 커지고 있다. 아파트 주민들이 서로 협의해 규칙을 만들어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데, 그렇다고 축구, 야구 등 특정 놀이는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접근 방식은 또 다른 갈등을 양산할 뿐이라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세이브더칠드런 김희경 권리옹호부장은 “소음 없이 살 권리와 아이들의 놀 권리 모두 중요하겠지만, 두 권리가 충돌했을 때는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축구, 야구는 무조건 안 된다는 건 너무나 일방적인 것으로 아이들의 놀 권리 침해”라며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놀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아이들의 놀 권리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 보장하는 권리로, 아이들에게는 노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얼마나 잘 놀 수 있느냐는 부분은 아이들의 행복 정도를 정하는 큰 기준이 된다. 지난달 17일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가 발표한 ‘2013 한국 아동 삶의 질 종합지수’ 발표에 따르면 아동들은 지역에 대한 긍정적 인식 요인으로 놀이터와 잘 아는 주민, 편의시설 등을 꼽았다. 특히 놀이터가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곳이라고 인식하는 아동들은 지역사회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안전한 놀이터가 얼마나 아이들의 행복을 좌지우지하는지를 시사했다.
김 부장은 “축구, 야구를 할 수 있는 시간대를 정해주고 그 시간에는 할 수 있도록 합의해야 한다. 문제의 아파트의 경우 시설을 잘 만들었는데도 못놀게 하니 아이들의 불만이 더 클 것”이라며 “얼마나 좋은 시설을 아파트에 잘 만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마을 공동체가 아이들의 놀 권리를 중요성을 생각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잘 놀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시설을 함께 관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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