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 김은실 기자】
하루만 지나면 광복을 맞은 지 70주년이 된다. 여기에 여성 독립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일제강점기를 꿋꿋이 살아낸 여성 독립운동가가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식민 지배 아래 신음했던 조국에서 일상을 견뎌낸 평범한 여성, 그중에서도 워킹맘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윤진 연세대학교 교육연구소 전문연구원의 논문 '일제 식민지 탁아사업을 통해 본 일제의 여성관'을 토대로 일제강점기 워킹맘의 삶을 살펴봤다.
조선 여성들이 일터에 나가기 시작한 건 1920년대부터다. 일제가 급격히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임금노동자 숫자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들은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해야 했다. 이윤진 연구원에 따르면 조선 성인 남자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 성인 남자 노동자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장의 임금으로 한 가정을 꾸리기 어려워졌고, 저소득층 여성들은 일터로 나가기 시작했다. 조선 여성 노동자들은 일본 성인 남성 임금의 1/4 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일했다.
여성이 노동자가 되면서 아이들의 양육이 문제가 됐다. 가족에게 맡기고 일하는 이도 있었지만, 맡길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은 아이를 업고 일터로 향했다.
이 연구원이 논문에 인용한 그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여성 노동자와 그의 아이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지냈는지 알 수 있다. 다음은 한 여기자가 기혼여성 노동자가 많았던 정미소 고무공장을 방문해 쓴 기사의 일부다.
"정미소나 고무공장에서 보는 애기 딸린 어머니들의 노동이란 너무나 비참하였다. 고무 찌는 냄새와 더운 김이 훅훅 끼치는 공장 속에서 애기에게 젖을 빨리며 쇠로 만든 룰러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정미소에 돌가루가 뽀얗게 날리는 데서 갖까논 병아리 같이 마른 자식을 굴리는 것을 볼 때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 놓이면서 탁아소가 등장했다. 탁아소가 우리나라에 처음 생긴 건 1921년으로, 서울 태화사회관에서 탁아프로그램을 개설한 것이 최초다.
그 뒤로 1926년 부산공생탁아소와 대구탁아소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탁아시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단체들이 생겨났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해방 당시 탁아시설은 11개였다. 국고 지원을 받은 곳은 없었다.
아이들을 보호하려 만든 탁아소였지만, 환경은 열악했다. 1933년 기준으로 탁아소 한 곳에서 수용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50명인데 비해 돌보는 사람은 1~2명이었다.
이 연구원은 "탁아소가 국고의 지원 없이 운영됐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여성의 노동은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탁아소가 열악한 양육 조건에서 운영되었다는 점에 아동의 권익 역시 철저하게 묵과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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