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분홍색 좌석, 누구를 위한 자리인가?
시내버스 분홍색 좌석, 누구를 위한 자리인가?
  • 이유주 기자
  • 승인 2017.06.14 16: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신부배려석은 공동체가 품어야 할 '여유공간'"

【베이비뉴스 이유주 기자】

 

 "임신부배려석이 비어 있는 경우는 한 달에 한 번도 안 돼요."

버스로 출·퇴근을 하는 임신부 유하영(가명·36주·서울 구로구) 씨는 임신 기간 동안 비어 있는 임신부배려석을 이용한 경우가 손에 꼽는다. 임신을 확인한 날부터 임신부 배지를 가방에 달고 다녔지만 임신부배려석을 양보 받은 적도 드물다. 

유 씨는 "임신부배려석 앞에 아무리 오래 서 있어도 양보는커녕 제 배를 보고 자는 척을 하는 분들이 꽤 있다"며 "민망해서 배려석 근처에 서 있지도 못한다"고 씁쓸해했다.

이어 "특히 임신 초기에는 입덧 때문에 1시간 이상 서서 가는 게 참 힘들었고 쓰러질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며 "남일 보듯 하는 시민들이 많아 버스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몇 번 있었다. 임신부배려석은 누구를 위한 자리냐"고 토로했다. 

출입문 맞은편 핑크색 시트가 씌어진 임신부배려석. 버스에 도입된 지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임신부들이 마음 놓고 이용하지 못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12일 오후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서 한 여성이 임신부배려석에 앉아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12일 오후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서 한 여성이 임신부배려석에 앉아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 버스 내 임신부배려석 도입 8년…실효성 '글쎄'

버스 내 임신부배려석은 지난 2009년 서울시 시내버스의 바른 정차를 유도하기 위한 '해피 버스데이'(HAPPY BUS DAY) 캠페인의 일환으로, 교통약자인 임신부를 배려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이후 부산, 인천, 울산 등 광역시를 포함해 진주, 경주, 공주, 춘천, 논산 등 전국 시와 경남도, 강원도, 제주도 등 도 단위도 관내 버스에 임산부배려석을 꾸준히 확대해왔고, 그 결과 현재 전국 많은 버스에 임신부배려석이 만들어진 상태다. 특히 서울, 대전, 부산은 마을버스에도 임신부배려석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 교통정책국 관계자는 "서울은 현재 모든 버스(7421대)에 임신부배려석이 한 좌석 이상 설치돼 있다"며 "저출산 정책이 강화되고 모성 보호 분위기가 커지면서 전국적으로 버스에 임신부배려석 설치가 확대되고 있는 추세로 보인다"고 전했다. 

하지만 버스 임신부배려석이 지하철 임신부배려석보다 2년 먼저 도입·운영됐음에도 불구하고 임신부들은 "오히려 지하철보다 버스 내 임신부배려석이 비어 있는 경우가 훨씬 적다. 있으나 마나 한 좌석"이라며 불편함을 토로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지난 8일 오전 기자가 장지동에서 여의도까지 운행하는 461번 버스(서울시)를 2시간 30분가량 타봤더니 경비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할아버지와 중년의 아주머니 등 엉뚱한 주인들만 떡 하니 임신부배려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모든 좌석이 비어 있을 때도 머리가 희끗한 한 아주머니는 임신부배려석을 골라 앉기도 했다. 

결국 이날 기자가 본 461번 버스의 임신부배려석은 버스에 승객이 적어 좌석이 빌 때를 제외하고 단 1분도 임신부를 위해 비워지지 않았다.  

산부인과에 갈 때마다 버스를 이용한다는 임신부 김소영(가명·33주·서울 중구) 씨는 "버스 임신부배려석은 항상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앉아 있어 정작 저는 일부러 뒤쪽에 가서 서 있게 된다"며 "배려를 찾아볼 수 없어 씁쓸함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김 씨와 같이 임신부배려석을 이용할 권리가 있음에도 오히려 눈치를 보는 임신부는 적지 않다. 

다른 한 중기 임신부는 "(양보 받는 경우가 없어) 대중교통을 타는 게 눈치 보이고 꺼려져 비싼 돈 들더라도 택시 타거나 4~5 정류장 정도까지의 거리는 걸어 다닌다. 몸이 힘들어도 쉬엄쉬엄 걸어가는 게 마음 편하다"면서도 "언제까지 이러고 다닐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답답해했다. 

이처럼 배가 부른 중기, 후기 임신부도 임신부배려석을 마음 편히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외관상 일반인과 별 다른 차이가 없는 초기 임신부는 더더욱 임신부배려석을 이용하거나 양보 받기가 녹록지 않다. 

버스를 타고 통근하는 초기 임신부 박세연(가명·12주) 씨는 "초기라 엄청 예민하다. 임신부 배지도 잘 보이게 가방에 달고 임신부배려석 앞에 서 있어도 자리를 단 한 번도 양보 받지 못했다"며 "그냥 양보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 조심해서 다녀야겠다"고 털어놨다. 

12일 오후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 비어 있는 임신부배려석.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12일 오후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 비어 있는 임신부배려석.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 "임신부, 버스에서 안정적 좌석 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임신부에게는 안정적인 좌석이 필요하다. 특히 버스는 급출발, 급정거, 회전과 더불어 울퉁불퉁한 노면을 달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하철보다 더욱 안정적인 좌석이 요구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류지원 미래아이산부인과 원장은 "임신부는 일반인보다 균형감각이 떨어지는 데다가 버스의 안정적이지 못한 주행으로 넘어지거나 배를 부딪힐 확률이 높다"며 "개인 차가 있겠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증상도 심해지기 때문에 버스에서는 좌석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임신부 중에서도 특히 초기 임신부에게는 좌석이 더 절실하다. 갑작스러운 호르몬의 변화로 어지럼증, 두통, 입덧, 피로감 등 다양한 증상을 겪는 것은 물론 감기에 걸린 듯 몸이 무겁고 졸음이 늘어나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반이 온전히 형성되지 않은 임신 14주 전까지 급정차, 급가속, 급차선변경, 과속운전 등 버스처럼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많은 곳에 장시간 서 있으면 하복부에 무리가 가 유산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렇듯 임신부는 신체적으로 배려 받아야 할 교통약자이지만 임신부배려석의 주인 행세를 마땅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 "비워두는 배려 필요해요"

임신부들은 지하철처럼 버스에도 임신부배려석을 비워두는 문화나 제도가 확대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례로 현재 지하철 9호선은 임신부배려석에 방석과 곰 인형을 비치해 임신부가 배려석에 앉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테디베어 곰인형 및 방석'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부산지하철 역시 임신부가 열쇠고리 모양의 비콘을 갖고 지하철을 타면 배려석에 설치된 핑크라이트가 자동으로 켜져 자리를 양보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서울 지하철 1~9호선은 임신부에 대한 배려를 정착시키기 위해 '임신부배려석 비워두기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육아맘 정가영(33·임신 7개월·서울 영등포구) 씨는 "임신부에게 버스는 지하철보다 더 지옥이다. 그런데 임신부배려석에 대한 홍보도 전혀 없고 인식이 전무하다"며 "버스도 임신부들이 자주 이용하는 교통수단인 만큼, 당장은 어렵더라도 지하철처럼 임신부들을 배려할 수 있는 '자리비워두기'나 인식개선 캠페인 같은 게 꾸준히 시행되면 좋겠다"고 힘줘 말했다.

최근 인천시는 이러한 임신부들의 마음을 대변해 모든 시내버스(1991대)에 '임신부를 위해 미리 비워두세요' 문구가 적힌 핑크색 커버를 새로 제작해 순차적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임산부영양제 브랜드 솔가는  인천시의 임신부배려석 커버 교체사업에 핑크색 커버 1000대 분을 후원했다.

인천시는 솔가의 후원을 받아 인천시 모든 버스의 임신부배려석을 새로 교체하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인천시는 솔가의 후원을 받아 인천시 모든 버스의 임신부배려석을 새로 교체하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한국솔가 백준영 과장은 "임신부배려석은 위치나 디자인 등이 제각기인 경우가 있는데, 하나의 통일된 가이드로 배려석을 운영하면 시민들의 눈에 더 잘 띄고, 인식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국민 모두가 저출산 위기를 공감하고, 이들을 배려하는 데 동참해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특히 이 임신부배려석 커버는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초기 임신부'를 위해 비워두자고 강조한 부분이 돋보인다. 백 과장은 "자연유산의 80% 이상이 임신 14주 이내 초기 임신부에게 일어나지만 배가 나오지 않아 배려 받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며 "만삭 임신부보다 위험할 수 있는 시기인 만큼 초기 임신부를 위해 비워두기 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배려석, 우리가 품어야 할 '여유공간'" 

임신부배려석은 법령에 의해 설치된 것이 아니라 교통약자인 임신부를 보호하자는 일종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강제가 아니라 협조해야 하는 문제인 만큼 전문가들은 지하철뿐만 아니라 버스 등 대중교통 임신부배려석에 대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광운대 영상미디어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공공소통연구소장 이종혁 교수는 "배려석은 특정 시대에 우리 사회, 공동체가 품어야 할 '여유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이종혁 교수는 지하철 9호선 '테디베어 곰인형 및 방석' 캠페인 아이디어를 제안한 공공소통연구소 내 공공소통프로젝트 라우드(LOUD) 팀을 이끌고 있다. 

이 교수는 "배려의 대상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하고 확대된다. 자리 하나를 놓고 실효성 자체를 따지는 논쟁거리로 봐선 안 된다. 그 자리가 갖고 있는 시대의 상징적 의미를 재고해봐야 할 문제"라며 "앞으로 새로운 배려의 대상이 생기고 배려석 문화가 뿌리를 내리려면 배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문제제기, 작은 실천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교수는 "지하철에서는 안내방송이나 캠페인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버스에는 이러한 소통의 노력이 전혀 없다. 심지어 임신부배려석 스티커만 달랑 하나 붙여진 버스도 있다"며 "약속과 규율을 만들고 나면 소통이 따라와야 한다. 버스회사들도 사회적 책무를 인식하고 비워두기 캠페인을 실시하는 등 시민들의 인식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구보건복지협회 박상근 출산건강실장은 "버스는 민간기업(버스운송사업조합)이 운영하고 있어 그간 임신부 배려 문화를 정착 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버스에 임신부배려석 음성알림 서비스를 도입하거나, 버스 운전기사 교육을 실시하는 방법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시민들도 임신부배려석을 '초기 임신부가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비워두는 자리'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12일 오후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서 한 남학생이 임신부배려석을 비워둔 채 서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12일 오후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서 한 남학생이 임신부배려석을 비워둔 채 서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초기 임신부 배려 캠페인] 베이비뉴스는 "배가 나오지 않아서 더 배려가 필요해요" 초기 임신부 배려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임신 초기는 가장 배려가 필요한 시기이지만,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 부족한 실정입니다. 해피빈X포스트 공감펀딩(https://goo.gl/tPzB7h)을 계기로 초기 임신부 배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캠페인은 한국솔가와 함께합니다.

 
【Copyrights ⓒ 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베이비뉴스는 창간 때부터 클린광고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언론으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뉴스는 앞으로도 기사 읽는데 불편한 광고는 싣지 않겠습니다.
베이비뉴스는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대안언론입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에 동참해주세요. 여러분의 기사후원 참여는 아름다운 나비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베이비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베이비뉴스와 친구해요!

많이 본 베이비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8 경찰공제회 자람빌딩 B1
  • 대표전화 : 02-3443-3346
  • 팩스 : 02-3443-3347
  • 맘스클래스문의 : 1599-0535
  • 이메일 : pr@ibabynews.com
  • 법인명: 베이컨(주)
  • 사업자등록번호 : ​211-88-48112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 01331
  • 등록(발행)일 : 2010-08-20
  • 발행·편집인 : 소장섭
  • 저작권자 ©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인정보보호 배상책임보험가입(10억원보상한도, 소프트웨어공제조합)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유미 실장
  • Copyright © 2024 베이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ibaby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