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임신부에요" 꼭 말을 해야 하나요?
"저 임신부에요" 꼭 말을 해야 하나요?
  • 심우리 기자
  • 승인 2017.06.21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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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부 가방고리 달고 다녀도 양보 받기 힘들어 비체계적 예산 투입으로 제작 물량도 들쭉날쭉

【베이비뉴스 심우리 기자】
 

ⓒ베이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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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쟁이 시작됐어요.”

임신 10주차인 박지현(가명, 34) 씨는 둘째 아이 임신 후 또 한 번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입을 뗐다. 첫째 아이 임신 때 못지않은 심한 입덧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는 것도 문제지만, 왕복 3시간 넘게 걸리는 출퇴근길이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다는 것.

“첫째 임신했을 때도 배려받은 적은 단 한 번뿐이었어요. 한번은 교통약자석에 앉았다가 '젊은 사람이 왜 여기 앉느냐'고 호되게 야단맞은 적이 있는데 너무 억울해서 눈물도 안 나더라고요. 앞으로 8~9개월을 또 어떻게 버텨야 할지 고민이에요.”

결국 첫째 때는 쑥스러워 달지 않았던 ‘임신부 가방고리’를 보건소에서 받았다는 박 씨. “임신부 가방고리를 달아도 배려받기는 힘들다고는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박 씨는 퇴근길에 핑크색 임신부 가방고리를 눈에 띄게 가방에 달았지만 양보해 주는 이는 없었다.

◇ 핑크색 임신부 배지…실효성은 글쎄

최근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다보면 임신부 배려석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임신부는 유산의 위험, 입덧과 구토, 피로감 등 신체적·정신적 어려움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약자석'을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배려 차원으로 마련됐다. 이에 수도권 지하철 1~9호선은 1차량 당 2좌석, 서울·경기 버스는 1차량 당 1좌석을 임신부 배려석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임신부들에게 임신부 배려석은 여전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초기 임신부는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아 이용이 힘들고, 배가 나오기 시작하는 중기 임신부 역시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반 승객들 때문에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 임신부에요”라고 말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임신부들에게 임신부 배려석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된지 오래다.

임신부 배려 엠블럼. ⓒ인구보건복지협회
임신부 배려 엠블럼. ⓒ인구보건복지협회

이렇듯 임신부 배려석에서 조차 배려받지 못하는 임신부들의 고충을 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임신부 배지(혹은 임신부 가방고리)’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임신 초기 여성들과 임신부들의 안전을 위한 취지로 만들어졌다. 지난 2006년부터 이벤트나 캠페인 형식으로 진행되던 것을 2011년 정부가 본격적으로 맡아 배지나 가방고리 형태로 제작 및 배포하고 있다.

하지만 시행된 지 10년 가까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임신부 엠블럼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가 부족하다보니 엠블럼 의미를 모르는 시민들의 인식 부족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출퇴근 시 1호선을 이용한다는 지관호(가명, 29) 씨는 “임신부 배려석은 핑크색으로 표시돼 있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임신부 가방고리는 잘 모르겠네요. 딱히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잘 모르죠”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일반 승객 전채룡(가명, 57) 씨는 “딸 아이가 임신했을 때 목에 걸고 다니던 건 아는데, 이름이 있는지 몰랐네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임신부들이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에도 임신부 가방고리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과 정부의 홍보부족을 지적하는 의견이 흔하다.

아이디 윤별**은 “임신부 배지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배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가방고리보다는 사람들의 인식 개선이 더 문제”라고 말했다. 또 koe**도 “초기에 임신부 가방고리 달고 교통약자석에 탔다가 ‘임신이 대수냐’는 한 어르신에 말에 큰 상처를 받았다”며 “배지만 배포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홍보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임신부 가방고리는 복불복?…남는 예산으로 제작해 매년 수량 부족

시민들의 인식 문제도 시급하지만 임신부들이 가장 큰 문제로 꼽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임신부 배지나 가방고리를 받는 것조차 힘들다는 점이다.

임신 9주차인 김송현(가명, 35) 씨는 “동네 보건소가 주말에는 운영을 하지 않아서 휴가까지 내 임신부 가방고리를 받으러 갔는데 다 떨어졌다고 하더라”며 “몇몇 친구들은 지하철에서도 없다고 해서 못 받았다는데, 도대체 어디서 주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현재 정부는 매년 10월 10일 임신부의 날을 즈음해 임신부 배지를 제작해 서울시 25개 보건소와 서울 지하철 1~8호선 지하철, 공항철도 내에서 배포하고 있다. 카드형 목걸이와 가방고리 두 종류로 제작됐지만, 최근에는 임신부들의 요청으로 가방고리만 제작하고 있다.

하지만 매년 제작 및 배포되는 수가 다르다보니 보건소나 지하철 역사 내 사정에 따라 확보하고 있는 수량은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임신부 배지를 처음 시작하던 2011년에는 약 28만개가 제작됐지만, 2013년과 2014년에는 각 10만개와 4만개 제작에 그쳤다. 이후 작년까지는 해마다 약 24만개 이상 제작되며 증가 추세에 들어서고 있지만 국내 평균 출생아 수가 약 40만 명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턱 없이 부족한 숫자다.

이렇듯 수량이 부족하다보니 받을 수 있는 장소도 한정되기 마련이다.

지하철 9호선 역사에 걸린 임신부 배려석 포스터.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지하철 9호선 역사에 걸린 임신부 배려석 포스터.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정부는 서울교통공사가 운영하는 1~8호선에 매년 약 3만 여개의 가방고리를 보내고 있지만 각 지하철마다 재량껏 분배하다보니 이용자가 많은 지하철 역사는 일찌감치 소비되는 경우도 많다. 또 5~8호선에서만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특정 지하철 역사에 임신부들이 몰리는 경우도 있다.

특히 보건소는 대부분 주말 운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직장에 다니는 임신부는 보건소에서 가방고리를 받기 어렵고, 보유하고 있는 물량이 부족할 때가 많아 미리 확인하지 않으면 김 씨처럼 헛걸음을 할 수도 있어 임신부들의 불만이 높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울도시철도공사(현재 서울교통공사)는 지난 2012년과 2015년 각 5000개와 1만개를 정부의 지원 없이 임신부 가방고리를 자체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그래도 수도권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지방의 경우 보유 물량이 더 적어 보건소에서 조차 받을 수 없는 곳이 허다하고, 지방 지하철이 있는 지역이라고 해서 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구보건복지협회 관계자는 “임신부 가방고리는 표준모자보건수첩을 만드는 예산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수첩을 만든 뒤 일부분을 가방고리로 만드는데 사용하다보니 수량이 넉넉한 편은 아니다”라면서 “카드 목걸이와 가방고리,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할 때는 아무래도 원가가 높아 제작 수량이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최근에는 차이가 좁혀지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 임신부 가방고리, 적극적인 홍보로 시민 인식 바꿔야

임신부 배려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정작 배려 받지 못하는 ‘임신부 가방고리’. 임신부들은 사람들의 인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임신부 가방고리는 비효과적인 정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신 31주차인 김태심(가명, 34) 씨는 “가방고리만 달면 뭐하나요. 겨우 지하철 역사에 포스터 한 장 붙여놓는 것밖에 없으니 사람들이 알아볼 수나 있겠어요”라며 “임신부가 배려 받는 사회를 만들려면 가방고리를 만들 게 아니라 더 적극적인 홍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임신 11주차인 심연화(가명, 38) 씨도 “임신부를 배려하기 위해 마련된 좋은 정책이지만,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다. 결국은 쓸데없이 세금만 낭비하는 꼴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 역시 같은 의견을 내놨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동식 박사는 “임신부 배려라는 것이 일정한 룰이나 규정, 원칙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승객들 역시 이에 대한 중요성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광고가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나라가 없다. 이 광고들을 일반 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 아니라 임신부를 배려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가 이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경희대 사회학과 김현식 교수도 “좋은 정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무용지물을 만드는 것에 다름없다. 임신부 가방고리가 제대로 활용될 수 있도록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다각적인 홍보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보건복지부 출산정책 관계자는 “시민들의 인식이 낮은 만큼 매년 10월 10일 임신부의 날 임신부 가방고리를 비롯해 임신부 배려에 관한 다양한 홍보를 진행 중”이라며 “다양한 설문조사를 통해 심층적으로 알아보고, 온라인이나 지하철 공사, 지자체와 협력해 임신부 가방고리에 대한 홍보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9호선은 임신부 배려석에 테디베어를 놓아두는 등 다양한 임신부 배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지하철 9호선은 임신부 배려석에 테디베어를 놓아두는 등 다양한 임신부 배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초기 임신부 배려 캠페인] 베이비뉴스는 "배가 나오지 않아서 더 배려가 필요해요" 초기 임신부 배려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임신 초기는 가장 배려가 필요한 시기이지만,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 부족한 실정입니다. 해피빈X포스트 공감펀딩(https://goo.gl/tPzB7h)을 계기로 초기 임신부 배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캠페인은 한국솔가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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