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야근과 회식으로 늦게 귀가했다가, 오늘은 모처럼 일찍 퇴근해 집에 왔습니다. 아빠 얼굴을 잊지 않은 둘째 빈이가 반갑게 다가오네요. 하지만 인사는커녕 양팔 뒤로 숨겼던 책 한 권을 꺼내며, “아빠, 이 책 읽어 줘”라고 말합니다.
‘먼저 씻고 저녁 먹은 후에 읽어도 될까’하고 말해보려 멈칫거리는 순간, 녀석은 벌떡 일어나 쪼르르 식탁으로 갑니다. 책 읽느라 입을 오물거릴 아빠를 따라, 자신도 입을 오물거리려 쌀 과자 두 개를 가져옵니다. 정말 다행히도 그중 하나는 아빠 것이라고 하네요.
빈이가 가져온 책 '알라딘'을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알라딘은 자스민 공주를 만나고 호감을 느끼지요. 그런데 곧 마법사 자파에 의해 궁지에 몰립니다. 그러다 우연히 먼지투성이 램프를 문지르고 램프의 요정 지니를 만나게 되죠. 그 뒤는 아시죠? 알라딘의 인생이 확 달라집니다.
책에서 알라딘이 지니를 만날 즈음, 빈이가 제 손에 올려진 과자를 가리킵니다.
“이거” 하고 물으니, “응” 하고 가져갑니다. “왜 가져가” 하고 물으니, “소원을 들어줘야지”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아빠 과자를 먹었으니 녀석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되어 제 소원을 들어줄 모양입니다. 기특하지요? 그래서 저는 “음… 지금 아빠 소원은…. (좀 씻고 밥도 먹고…)”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랍니다. 아빠는 덩치가 크니까 지니이고, 자기는 작으니까 알라딘인 거랍니다. 그러니 지니가 알라딘의 소원을 들어주듯 아빠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억울하지만 쉽게 녀석의 논리에서 벗어나질 못하겠더라고요.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내게도 지니가 간절히 필요하다 느끼는 순간, 어깨 너머로 “엄마가 읽어줄게. 아빠는 지금 너무 배고파 힘이 없거든” 하는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다름 아닌 아내입니다. 온 얼굴이 다크 서클이 될까 봐 살짝 불쌍했던 모양입니다.
아내 덕에 개운하게 씻고 배불리 먹고 나니, ‘양육자에게 램프의 요정이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육아의 고단함에 관한 이야기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육아 우울증으로 인해 양육자나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이 유명(幽明)을 달리하는 사고 소식도 종종 듣게 되니까요. 그 사정과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혹여 그들에게도 램프의 요정, 지니가 있었으면 어떠했을까요.
물론 궁궐 같은 집을 마련해주거나 더는 노동을 하지 않고도 평생 쓸 수 있는 돈을 주는 지니는 없을 테지만, “마음속에 억눌린 이야기 꺼내볼까” 하고 옆에 앉아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지니면 어떨까요? 또 일상에 지쳐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나란히 앉아 시원한 물 한 모금 건네는 지니면 어떨까요? 누군가 나와 함께 있다는, 같은 편에 있다는 것만으로 때론 큰 위안이 되기도 하니까요.
오늘 저에게 아내는 램프의 요정, 지니였습니다. 기나긴 달리기 끝에 타는 목마름을 달래주는 생명수 같았죠. 내일은 제가 아내의 지니가 되어보려 합니다.
참, 알라딘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세요? 바로 지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었답니다.
우리가 아내에게 남편에게 서로의 지니가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칼럼니스트 윤기혁은 딸이 둘 있는 평범한 아빠입니다. 완벽한 육아를 꿈꾸지만 매번 실패하는 아빠이기도 하지요. 육아하는 남성, 아빠, 남편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은밀한 속마음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저서로는 육아의 온도(somo, 2014), 육아살롱 in 영화, 부모3.0(공저)(Sb, 2017)이 있으며, (사)함께하는 아버지들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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