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어머니' 하러 갔다가 동시 지은 사연
'녹색 어머니' 하러 갔다가 동시 지은 사연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19.04.03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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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한번 해봤어] 한 번쯤은 해봐도 좋은 이유

아이들 학교 앞에서 교통안전 지도를 하는 녹색 어머니회 활동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몸살을 심하게 앓고 난 뒤였다. 남편이 갈 수도 없는 상황. 봄은 오고 꽃들은 팡팡 터지는 봄이지만 나는 겨울 잠바를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모자도 깊게 눌러쓰고, 마침 미세먼지도 '나쁨'이라 마스크도 챙겨서 학교로 갔다. 다리에 젖은 모래주머니라도 찬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 애들 학교 녹색 어머니회 활동하는 날이라 근무 시간을 1시간 정도 미룰게요.”

“응. 얼른 녹색 어머니회가 없어져야 할 텐데….”

녹색 어머니회 활동 시간은 오전 8시 20분부터 50분까지 30여 분 남짓. 오전 8시부터 근무하는 나는 근무 시간을 1시간 정도 조정해야 했다. 부서장에게 양해를 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더니 하는 말. 부서장이 한 말이 맞는 말이라고 동의를 하면서도 “그래도 한 번쯤은 해봐도 좋은데”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이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을 알게 돼서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전교생에 의무적으로 녹색 어머니회를 하도록 강제하는지라 1년에 한 번 정도 순번이 돌아온다. 큰아이가 어느덧 6학년이니, 6년 동안 1년에 한 번은 녹색 어머니회 활동을 했다. 정해진 구역에 가서 노란색 안전 조끼를 입고, 신호등 신호에 따라 깃발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면 되는 일이다. 크게 힘든 일은 없다.

학교 주변은 어린이 보호구역인데도 차들이 어찌나 쌩쌩 달리는지, 처음엔 내가 다 겁이 날 정도였다. 정지선을 무시하고 횡단보도까지 차 머리를 들이대는 운전사도 있고,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좀처럼 여유 있게 운전하는 이들을 보기 힘들었다. 그런 운전자들을 만날 때면 사정없이 눈빛 레이저를 쏘아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운전자들이 더 많았다.

부서장 말처럼 학부모들에게 부담을 주는 녹색 어머니회 활동이 없어져야 할 일임은 맞지만, 한 번쯤은 해보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이 때문이다.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 주변의 안전이 어떤지 몸소 알게 되었달까. 덕분에 아이들에게 시간 날 때마다 차조심 하라고 신신당부하는 잔소리는 늘었지만.

큰아이가 찍어준 녹색 어머니회 활동 모습. ⓒ최은경
큰아이가 찍어준 녹색 어머니회 활동 모습. ⓒ최은경

그런데 이날은 평소와 좀 다른 경험을 했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아이들 틈 사이로 어느 남자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어? 비둘기가 '신호등'을 건너가네… 빨간 불인데….”

“그러네, 진짜.”

근처에서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비둘기를 쳐다보며 웃었고, 나는 엄마 미소가 절로 나왔다. 혹시나 저 문장을 잊을까 봐 급하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음성 녹음까지 해뒀다. 아이 말이 곧 시였다. 길에서 동시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횡단보도를 신호등이라고 말하면 좀 어떤가. 상관없었다. 시적 허용이라는 것도 있지 않나. 금세 신호등이 바뀌고 아이들이 학교로 들어갔다.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다.

노란색 안전 조끼와 깃발을 반납하고, 서둘러 일터로 향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발걸음이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나 혼자 보물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마음이. 아이의 말 한마디로 세상 따뜻한 봄기운이 다 내게로 온 것만 같았다. 이 봄, 작자 미상 초등학생 동시 한 편 읊으며 글을 맺는다.

비둘기가
횡단보도를 건너가네.

.

.

빨간 불인데….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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