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29개월에 네 살이 된 영이. 작년 12월부터 “영이는 언니야”라는 말을 매일같이 해왔다. 어린이집 동생 반인 새싹 반에서 형님 반인 풀잎 반으로 진급했는데, 자신이 언니가 됐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던 모양이다. 내가 칭찬만 하면 “왜? 내가 언니라서?”라고 되묻기 일쑤였다.
그런데 ‘언니’가 된 지 6개월이 지난 요즘, 영이는 종종 “엄마, 나는 동생이야?”라고 묻곤 한다. 최근엔 이런 일도 있었다. 자기 전에 함께 누워 동화책을 읽는데, 한 여자아이가 동생이 탄 유모차 옆에 나란히 선 그림을 보게 됐다. 이 그림을 본 영이가 이렇게 말했다.
“언니는 유모차 안 타. 언니는 자전거 타.”
“우리 영이는 자전거도 타고 유모차도 타는데. 그치?”
“응. 영이는 ‘동생’이어서.”
‘동생이어서’라는 대답에 웃음이 났다. 그런데, 요새 왜 자꾸 영이가 자신이 동생인지 아닌지 이 사실을 확인하려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영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동생은 유모차도 자전거도 둘 다 타는 거야? 그럼 영이는 동생이야? 아니면 언니야?”
영이는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영이는 동생이야.”
영이의 대답에 “영이 언니 할까?”라고 물어보니, 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동생 할래. 아직 동생 하고 싶어.”
영이는 왜 6개월 만에 그 좋아하던 언니 역할을 두고 다시 동생이 하고 싶어졌을까? 혹시 우리 어른들이 영이에게 언니 역할을 강요했나?
어른들도 그렇다. 내 역할 이상의 기대를 남들에게 받으면 부담되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할까봐 걱정도 된다. 그래서 영이가 느꼈을 부담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는 언니가 되었다고 기뻐하는 영이에게 “우와 언니라서 잘하는구나?”, “언니는 밥도 혼자 먹을 수 있어!”라고 말해왔다. 그뿐인가, 영이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 “영이는 이제 언니잖아”라며 아이의 표현을 차단해왔다.
처음 ‘언니’가 되었을 때 영이는 성취감과 더불어 언니로서 더 많은 경험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표현하고 싶은 것들은 차단되고 역할에 대한 책임만 늘어났으니…언니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다.
아이에겐 ‘아이다울 권리’가 있다. 그런데 많은 어른들이 그 권리를 무시한다. 그러면서 ‘아이다운’ 표현을 억제하고 ‘언니답게’, ‘의젓하게’를 강요한다. 이런 모습은 아이를 온전히 아이답게 바라봐 주지 못하고 아이의 정서적 표현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부터도 영이에게 ‘언니’라는 역할로 아이를 설득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이가 스스로 잘하길 바랄 때 어떤 말로 아이를 설득하면 좋을까 고민해봤는데, 잘 떠오르질 않는다. 내 기대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니…역시 영이가 엄마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구나 싶다.
아이다움. 그렇다면 엄마다움은 뭘까? 워킹맘으로 일터와 가정에서 각각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때면 가끔 숨이 ‘턱’하고 막힐 때가 있다. 엄마 또한 어떤 역할다움으로 인해 지쳐있는 모습보다는, 엄마가 ‘자신’다울 때, 아이에게 건강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며 좋은 모델링이 되어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글을 쓰는 나, 그리고 많은 엄마들에게 ‘나부터 나 자신을 잃지 말자’는 응원의 말을 남겨본다.
*칼럼니스트 이미연은 아동인권옹호활동을 하는 국제아동인권센터의 연구원으로, 가장 작은 자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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