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빈 자리를, 꼭 채워야 하나요?
아버지의 빈 자리를, 꼭 채워야 하나요?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1.07.16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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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보희와 녹양’ (2018)

27개월짜리 쌍둥이를 키우다 보면, 내가 이 아이의 모든 것, 이 아이의 우주라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말상대해주고, 놀아주고, 아기가 기분 좋을 때는 같이 웃어주고, 아기가 울 때는 달래주고,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하면 훈육하고, 칭찬 받을 행동을 하면 폭풍 박수를 쳐준다. 내가 이 아이의 보호자, 선생님, 친구이자 엄마이다. 내가 없으면 아이들은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이라는 세계의 열쇠를 내가 쥐고 있는 듯한 느낌, 더 나아가서는 내가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생각마저 든다. 너희들의 성장은 엄마인 내 손에 달려 있다!

맑고 싱그럽고 풋풋한 우정을 그린 영화, '보희와 녹양' ⓒKT&G 상상마당
맑고 싱그럽고 풋풋한 우정을 그린 영화, '보희와 녹양' ⓒKT&G 상상마당

‘보희와 녹양’(2018)을 보면서 내가 아이들에게 지금처럼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기는 매우 짧고, 청소년만 돼도 아이들은 성인 보호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이들의 성장은 엄마의 손이 아니라, 아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 아이들은 제 힘으로 성장한다.

섬세하고 소심한 소년 보희와 당차고 씩씩한 소녀 녹양은 같은 병원에서 같은 날 태어난 열네 살 단짝 친구다. 보희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같이 살고, 녹양은 어머니가 출산하다가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아버지와 산다. 어느 날, 보희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녹양과 함께 엄마 몰래 아빠 찾기에 나선다.

보희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서울 여기저기를 함께 쏘다니는 보희와 녹양. ⓒKT&G 상상마당
보희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서울 여기저기를 함께 쏘다니는 보희와 녹양. ⓒKT&G 상상마당

우여곡절 끝에 보희의 아버지를 찾은 둘.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 보희가 녹양에게 말한다. 어렸을 때, 언젠가부터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날마다 놀이터에 나가서 혼자 아빠를 기다렸다고, 그러다가 ‘아, 이제 아빠가 영영 안 오겠구나.’ 싶어서 혼자 울고 있는데 녹양이가 나타나서 말을 걸었다고. 그 후엔, 녹양이와 날마다 놀러 다니느라 아빠를 기다린 적이 없다고. 그러면서 말한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나 혼자 만나고 올게. 다신 아빠 찾지 않을 거야. 난 너 있으니까.”

다큐멘터리 감독을 지망하는 녹양은 보희가 아빠 찾는 과정을 기록한다. ⓒKT&G 상상마당
다큐멘터리 감독을 지망하는 녹양은 보희가 아빠 찾는 과정을 기록한다. ⓒKT&G 상상마당

진짜 친구가 있으니까 아버지의 빈 자리도 두렵지 않다는 보희의 선언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왜 나는 아버지의 빈 자리는 새아버지, 큰아버지와 같은 남성 성인 보호자가 채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어머니의 빈 자리 또한 마찬가지다. 부모 중 한 사람이 부재하다면, 그 부재는 어른들이 채워주고 메꿔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어린 아이로만 보였던 보희가 의젓한 청소년으로 성큼 자라 내게 물었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꼭 채워야 하냐고. 나는 아버지의 자리는 비어 있는 채로 그냥 두고,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내 아픔과 외로움을 잊었다고. 아, 그렇구나. 가족의 빈 자리에 반드시 또 새로운 가족이 들어올 필요는 없구나. 보희는 가족 밖 세상으로 나가 우정에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붙어 다니는 둘도 없는 친구, 보희와 녹양. ⓒKT&G 상상마당
언제 어디에서나 붙어 다니는 둘도 없는 친구, 보희와 녹양. ⓒKT&G 상상마당

우리는 흔히 부모의 부재를 치유될 수 없는 상처, 절대적인 결핍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편견 아닐까. 이 영화에서 한 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보희와 녹양의 삶은 특별하게 불행하지도 않고, 유별나게 행복하지도 않다. 모든 아이의 삶에 각자가 처한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보희와 녹양에게도 부모의 부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일 뿐이지, 무슨 뛰어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아니다. 열네 살 보희와 녹양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위로 받으면서 각자 알아서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간다.

윗집에는 우리 쌍둥이와 어린이집 같은 반인 동갑내기 친구가 사는데, 그 집이 내일 이사를 간다. 오늘 우연히 아파트 단지 내에서 그 아이를 마주쳤다. 쌍둥이들이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지만, 설명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아기들에게 말했다. “이제 OO이가 이사 가서 내일부터 못 본대. ‘안녕, 잘 지내.’ 인사해.” 그러자 윗집 아이가 갑자기 들고 있던 사탕 꽃다발에서 사탕을 두 개 쑥 뽑더니 우리 쌍둥이들에게 건네줬다. 우리 집 아이들은 집에 와서도 한참 동안 그 사탕을 가지고 놀면서 “OO이가 이사 간대.”라고 말했다. 이사의 뜻이 뭔지 알고는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세 살짜리 아이들도 이렇게 상호작용 비슷한 걸 하긴 하는구나. 신기했다.

너희들의 세계가 친구를 통해 더 크고 넓게 확장되길 ​ⓒKT&G 상상마당​
너희들의 세계가 친구를 통해 더 크고 넓게 확장되길 ​ⓒKT&G 상상마당​

우리 집 아이들은 쑥쑥 자라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할 것이다. 오늘처럼 사탕을 받기도 하겠지만, 사탕을 줄 일도 있을 것이고, 사탕을 주고 싶은 친구가 생겼는데 거절 당할 수도 있고, 서로 마음이 맞아 사탕을 주고받으면서 자기들만의 추억을 쌓을 수도 있겠다. 기쁨과 설렘으로 마음이 말랑말랑해질 때도 있겠고, 슬픔과 분노로 마음이 무너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나누는 그 모든 감정이 아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같은 사탕이라도 부모가 준 사탕과 친구가 준 사탕 맛이 같지 않겠지. 아이들이 친구들을 사귀면서 부모가 제공해줄 수 없는 관계의 행복을 느끼고, 부모와 공유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성장했으면 좋겠다. 보희와 녹양 같은 인생 친구를 만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테고. 우리 아이들도 누군가에게 보희와 녹양 같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도록, 잘 키워봐야겠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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