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린이는 외할머니를 닮았습니다. 갸름한 얼굴에 가지런한 눈썹, 웃으면 가느다래지는 눈, 앞머리를 뒤로 넘겨 빗으면 뽀얗게 드러나는 이마가 특히 닮았습니다. 입을 다문 채 부드럽게 미소 지을 때 외할머니와 똑같습니다.
7월의 어느 날, 일곱 살 수린이와 산책을 나섰습니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묶음머리를 하니, 매년 이맘때면 모시적삼을 즐겨 입고 비녀를 꽂던 외할머니가 오버랩돼 보였습니다.
“우리 수린이, 엄마 외할머니랑 똑같네!”
수린이는 엄마의 외할머니를 뵌 적이 없습니다. 수린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1년 뒤 엄마 배 속에 수린이가 생겼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외할머니였을까?”
“엄마 외할머니가 다시 ‘나’로 태어난 걸까?”
일곱 살 수린이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을 걸었습니다.
“엄마가 죽으면 제 딸로 다시 태어나세요!”
“그러려면 좀 일찍 죽어야겠는걸?”
“아니, 아니. 나중에 엄마가 죽으면, 제 손녀로 태어나세요!”
“수린이 손녀 태어날 때까지 살아 있을 건데?”
수린이는 외증조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외증조할머니는 정말 강한 분이셨어. 전쟁 통에 갓난아이를 업고 쌀을 한 보따리 싸들고 피난을 가셨대. 겨울에 산 속에 먹을 게 없어서 생쌀을 입에 넣고 불려서 젖을 만들어 아이에게 먹였대. 강을 건널 때면 아이를 번쩍 들어올렸고 밤이면 온몸으로 아이를 감싸서 추위를 피했다고 하시더라. 아이를 살리겠다는 생각 하나로 전쟁을 버텨내셨대.”
수린이는 들고 있던 가방을 번쩍 치켜들기도 하고 온몸으로 감싸안기도 하면서 외증조할머니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습니다.
아파트 화단 가득 수국이 피어 있습니다. 만개한 수국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둘이서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작은 꽃들이 모여 커다란 꽃송이를 이루는 수국 꽃이 전쟁 통에 아이를 안고 있는 외증조할머니를 닮았습니다.
“엄마,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요?”
“수국!”
나 다시 태어나면
그대 뒤란에
수국꽃으로 피겠네
잦은 비에 마음 젖기 쉬운 장마철
그대 마음 환하게 밝혀줄
한 떨기 수국꽃으로 피었으면 좋겠네
작은 꽃들이 모여
커다란 꽃송이를 이루는 수국꽃처럼
내 안에 피는 자잘한 꽃들
주먹밥처럼 꾹꾹 뭉쳐서
그늘진 그대 뒤란에
크고 부신 사랑의 꽃으로 피고 싶네
- 백승훈 시 '수국꽃'
일곱 살 수린이가 그림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엄마의 다음 생’을 그리려고 아파트 화단을 돌며 떨어진 꽃잎을 주워 담았습니다. 엄마가 다음 생에 수국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껏 꽃잎을 붙였습니다. 분홍색 꽃잎은 엄마의 밝은 모습, 파랑색 꽃잎은 엄마의 어두운 모습입니다. 수린이는 엄마의 밝은 모습과 어두운 모습 모두 좋습니다. 그냥 엄마가 좋기 때문입니다.
일곱 살 때 수린이가 그린 ‘엄마의 다음 생’을 보면 외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전쟁 통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강인하게 살아낸 할머니 삶을 생각합니다. 내 삶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잘 살아야겠습니다.
*칼럼니스트 김정은은 글 쓰는 엄마입니다. 다년간 온 가족이 함께 책을 읽은 경험을 담은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2016)과 엄마와 두 딸의 목소리를 담은 「엄마의 글쓰기」(2017)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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