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터져요, 가정이 박살나게 생겼어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장관에 대책 마련 촉구

“가습기살균제로 삶이 180도 변했습니다. 정부에서 믿고 써도 된다고 해서 썼다가 이런 피해를 입었는데 정부에서 나 몰라라하니 속 터집니다. 가정이 박살나게 생겼어요. 도와주세요!”
24일 가습기살균제로 폐이식을 받은 김성태(42) 씨는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이 같이 호소했다. 진 장관은 이날 오후 1시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자신의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및 피해가족들과 면담을 진행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세상에 알려진 지 만 2년을 넘기고 나서야 피해자들과 정부 고위관계자의 첫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물론 피해자들은 그동안 병원비 혜택이나 피해보상을 전혀 받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살아왔다.
김 씨는 이날 면담 테이블 위에 자신의 폐를 찍은 CT 필름과 두툼한 약봉지를 올려놓았다. 하얗던 폐가 시커멓게 변해버린 모습이 담긴 CT 필름, 그리고 그 죽어가는 폐를 살리기 위해 김 씨가 달고 사는 약봉지. 진 장관에게 직접 보여주려고 김 씨가 가져온 것들이다.
김 씨는 2011년 8월 호흡곤란으로 병원을 찾았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원인 미상 폐질환 소견을 받았다. 입원 4일 만에 상태가 심각해져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몇 시간 사이 폐가 굳은 채 죽어가 폐 이식까지 받았다. 김 씨는 진 장관 앞에서 웃옷을 걷어 올리며 가슴에 남겨진 흉터도 보여줬다.
김 씨는 “(가습기살균제로 내가 피해를 입으면서) 딸아이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겼고 언어장애도 왔다. 병원비 때문에 빚이 1억 원이 넘었다”고 호소했다. 감기나 기관지염이 자주 걸리고 잘 낫지 않는 김 씨의 다섯 살 딸아이도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질병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이날 진영 장관과의 면담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요청으로 마련됐다. 진영 장관을 비롯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이언주 민주통합당 의원, 폐손상조사위원회 공동위원장인 백도명 서울대 교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및 피해가족 10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 시간 가량 면담이 진행됐다.
아들 임성준(11) 군과 함께 온 권미애(37) 씨도 진 장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했다. “아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어요. 작년까지는 목에 산소호흡기를 꼈고 지금은 코에 낀 상태에요.”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던 성준 군은 첫돌이 지나고 나서 단순 감기로 병원을 찾았다가 원인 미상의 폐렴, 폐섬유화, 급성 호흡부전증 등으로 증세가 악화되고 말았다. 이후 지금까지도 산소호흡기를 달고 생활하고 있으며 호흡이 가빠서 오래 걷지 못해 유모차를 타고 다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했다.
성준 군은 이날도 어김없이 유모차에 앉았다. 유모차가 작은지 유모차 밖으로 성준 군의 어깨가 삐져나왔다. 면담장소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낯선 지 신기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집에서 가져온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며 지루함을 달래는 성준 군은 영락없는 11살 소년의 모습이었다.

2011년 8월 가습기살균제가 원인미상 폐질환의 원인으로 확인된 뒤, 피해자들은 환경보건시민센터 등과 함께 가습기살균제 사태에 대한 정부 대책 등을 촉구해왔다.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몇 명은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복지부를 비롯한 환경부 등 관계 부처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제대로 된 조사나 정부 차원의 구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장관과의 면담을 촉구해도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최근 국회에서 가습기살균제 사태에 대한 관심을 갖고, 언론들이 다시 이 사태에 주목하고 나서야 이번 면담이 성사됐다.
이날 면담에는 가습기살균제로 아이, 아내, 손녀 등을 잃은 피해자 가족들도 함께 자리했다.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복지부 장관에게 범정부차원적 대책 마련을 비롯해 ▲중단된 피해조사 재개 ▲ 적극적인 피해자 찾기 ▲중증환자에 대한 긴급 의료지원 및 생활지원 ▲판매 기업에 대한 처벌 등을 요구했다.
특히 피해자들은 현재 활동을 중단한 폐손상조사위원회가 재가동되고 피해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 장관에게 호소했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는 지난해 말 가습기살균제가 원인미상의 중증폐질환 원인으로 지목된 지 1년이 훌쩍 넘어서야 가습기살균제 피해 진상규명을 위한 폐손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가습기살균제 피해 의심사례로 접수된 사례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폐 CT 검사 등의 후속 조사를 벌이겠다는 조사위원들의 뜻을 복지부가 거부하면서 조사위원들이 일괄 사퇴하게 됐고, 이로 인해 관련 조사는 중지된 상황이다.
진 장관은 피해자들의 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피해자 이름과 상황 등을 직접 메모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진 장관은 "폐손상조사위원회가 사퇴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일이 생긴 것에 대해 너무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복지부 장관으로서 정부를 대표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밝혔다.
이어 진 장관은 "장관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습기살균제에 대한 피해 보고를 받았다. 바로 피해 가족들을 뵙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국회 일정으로 늦어진 감이 있다"며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파악해 그에 대한 대처를 해야 하는데 다른 부처가 관련돼 있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고 노력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진영 장관은 면담에서 복지부에서 꾸린 폐손상조사위원회를 통한 피해자 조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총리실 주관의 종합적인 대책이 마련되는 과정에서 피해자 대책이 검토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가습기살균제로 아이를 잃은 최승운(39) 씨는 면담이 끝난 후 "오늘 분위기는 전체적인 얘기만 듣고 마는 수준이다. 어떠한 확답이나 약속이나 이런 건 없었다"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최 씨는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발생한 건 정부의 책임이고 3년 동안 방치한 부분에 대해 사과를 하고 거기에 대한 입장 표명을 먼저 해야 한다고 했으나, 장관은 '그건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적잖이 실망했다"며 "설상 복지부 장관이 아니더라도 입장 표명이 문제 해결의 첫 단추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말만 설왕설래하는 건 의미는 있겠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없다. 조사위를 언제 하자는 게 실질적인 첫 단계다. 조사위를 언제 열지는 조금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5월 첫 주까지 공식적인 회의를 한다는 게 없으면 사실상 말만 하고 시간끌기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시 판단을 해서 액션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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