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박사 수료생 엄마, 드디어 Dr. Lee 되던 날
만년 박사 수료생 엄마, 드디어 Dr. Lee 되던 날
  • 칼럼니스트 이은
  • 승인 2021.11.17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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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육아 인류학] 미국 유학생 엄마의 박사 논문 디펜스 이야기

드디어 D-day. 박사 논문 디펜스 날이 되었다. 박사 논문 디펜스는 완성된 박사 학위 논문에 대해 발표하고 논문 심사 위원분들의 질의와 코멘트에 응답한 후 최종 심사를 받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마침 작은 아이의 프리스쿨이 쉬는 날이었지만 정말 다행히도 디펜스 시간과 남편의 강의 시간이 겹치지 않아 디펜스 시간을 삼십 여분 남겨놓은 상태에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남편과 얼른 육아 교대를 할 수 있었다. 중요한 날이니만큼 아이가 내는 소리가 혹시나 방해가 될까 싶어서 남편에게 아이와 잠시 외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모든 과정이 버츄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하고 마지막으로 디펜스 중 발표할 내용을 점검하려니 만감이 교차하면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펼쳐졌다.

공부 하는 엄마가 갖는 제일 큰 고충은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공부 시간 확보가 더 힘들다는 점이다. 정해진 나만의 시간이 없기 때문에 육아나 집안 일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 새 내 공부 시간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임용이 된 남편처럼 경제적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내 공부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남편의 직장 때문에 원래 내가 몸 담고 있는 대학에서 멀리 이사 온 나로서는 나만의 연구실이나 공부 공간도 없기 때문에 늘 집에 있는 창문 없는 작은 방에서 없는 시간을 짜내어 공부 비스므레한 것을 해야했다. 그나마도 “엄마 문열어!”를 외치는 아직 어린 아이들과 늘 함께 였기에 나의 졸업은 요원해보였다. 특히 최근 디펜스 준비 기간 중에는 작은 아이를 돌본 것은 팔할이 아이패드 동영상이었다. 그 때문에 수반되었던 엄마로서의 죄책감 갖은 것은 둘째 치고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잠 많기로 유명한 나로서도 유일한 방법은 잠을 줄이는 것 뿐이라서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그 무섭다는 한국 고3 시절에도 꿋꿋하게 8시간 이상 잠을 챙기던 나였건만 늘 4~5시간 정도밖에 잘 수 없었다. 이 정도 수면 시간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잠 많은 것으로 늘 자부하던 나로서는 고욕이었다. 그나마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배부른 고민한다는 혹시나 모를 다른 이들의 비난이 두려워 가족이 아니고서는 쉽사리 힘든 티도 내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긴 시간 느리지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었나보다. 디펜스를 목전에 두고 두툼한 박사논문 완성본을 확인해보고 있자니 가슴이 몽글몽글한 기분이었다. 그저 무사히 통과하기 바랄 뿐이었다.

드디어 디펜스가 시작됐다.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치자 논문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질문과 코멘트가 쏟아진다. 날카로운 질문도 이어지고 대화도 오고 간다. 다행히 몇몇 질문은 비슷하게 예상했던 것이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질문도 나온다. 시작 전에는 꽤 긴장됐었는데 막상 디펜스가 시작되자 몇 년씩 내가 직접 써 내려간 내용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마치 자식 자랑하듯이 신나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영어가 아니고 한국말로 대답해도 된다면 좀 더 멋지게 잘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잠시 들기도 했으나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대답한다. 한시간 쯤 지났을 때 논문 심사 위원 교수님들을 다른 방으로 잠시 나가시고 디펜스 과정을 지켜보러 온 학우들과 다른 교수님들이 남으셔서 나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혼자 있었으면 그저 멍하니 있었을 텐데 함께 있어서 긴장도 잊고 그리운 학교 소식과 지인들 이야기가 오고간다. 몇분이 지났을까 논문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다시 들어오시고 지도교수님께서 만장일치로 내 박사 논문이 통과되었음을 알려주신다. 나도 모르게 어린 아이처럼 “Yay!”를 외치며 만세를 해버렸다. 교수님들도 웃으며 축하해주시고 논문에 대한 칭찬도 덕담처럼 덧붙여 주신다. 그 뒤로도 한시간 정도 계속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주고 받았다.

내 박사논문 초고. 250여장의 종이 안에 내 지난 몇년이,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은
내 박사논문 초고. 250여장의 종이 안에 내 지난 몇년이,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은

난 박사과정이 참 오래 걸렸다. 과정 중에 두 아이를 낳고 주(state) 경계를 넘나들며 4번의 이사를 했다. 힘들었지만 할 만했다. 그렇지만 나 혼자였으면 절대 못했을 것이다. 공부도 육아도 혼자는 너무 힘들다. 아이들은 저절로 자란다지만 누군가의 손길 하나하나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엄마든 아빠든 할머니 할아버지든 기관 선생님이든 누군가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늦은 밤까지 들여다 보며 적어내려가던 논문도 지도교수님의 코멘트나 동기의 응원이 없었다면 더 지독하게 외롭고 힘든 일이 었을 것이다.

디펜스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먼저 전화하고 시차가 있는 한국의 가족들에게는 메세지를 남겼다. 무엇보다 참 많은 것을 희생해준 친정 식구들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세상은 놀랍도록 바뀐 것이 없고 최종완성본을 다음 달 초까지 대학교에 제출해야하는 나의 일상도 그다지 바뀐 것이 없다. 세상은 그 흔하디 많고 많은 이박사 한 명을 더 얻었을 뿐이고 아이들에게도 나는 여전히 작은 방에서 무언가를 계속 적어내려가는 엄마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마치 갓 운전면허를 딴 사람처럼 나도 언젠가 도로가 아닌 학계에서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자격증이 생겼다는, 작지만 묘한 만족감으로 또 다른 내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엄마다. 그리고 나는 인류학박사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공부하는 엄마, 일하는 엄마, 전업으로 열심히 가정과 육아를 담당하는 엄마, 이 모든 엄마 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 

*칼럼니스트 이은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현재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작업을 하고 있다. 스스로가 좋은 엄마인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간순간마다 성장하는 중이라고 믿는 낙천적인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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