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성 소수자라면?
내 아이가 성 소수자라면?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2.01.0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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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너에게 가는 길’(2021)

내 아이가 성 소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직 세 돌도 안 된 어린 아이들이라서 어떤 행동을 보고 짐작한 건 아니고, 그저 ‘내 아이들이 당연히 이성애자일 거라고 단정 짓지는 말아야지.’ 허공의 뜬 구름 잡는 추상적인 수준의 결심이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은 성 소수자의 어머니 나비와 비비안의 이야기를 다룬다. “엄마, 나 (남자로 성별을 확정하는) 수술 받고 싶어.” “엄마, 나는 게이예요.” 나는 잠깐 상상해보고 말았던 상황이 나비와 비비안의 삶에 현실로 펼쳐진다.

자녀들의 커밍아웃을 받은 후, 나비와 비비안의 삶은 크게 변한다. ⓒ(주)엣나인필름
자녀들의 커밍아웃을 받은 후, 나비와 비비안의 삶은 크게 변한다. ⓒ(주)엣나인필름

34년차 소방 공무원 나비의 아들 한결은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치마를 입기 싫어했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녔고, 2차 성징 후 가슴이 커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고 한다. 한결은 자신의 몸을 보는 것이 싫어서 어두운 곳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살았다고, 죽고 싶어도 ‘지금 죽으면 여성으로 죽는 거라서’ 차마 자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나비는 한결의 가슴 절제와 자궁 적출 수술을 지지하고, 법적 성별 변경 허가 신청을 내는 과정에 함께 한다.

그런데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슴을 친 대목은 여기였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대 법대에 합격하고도 학내 반대가 거세지자 등록 취소를 한 사건이 있었다. 한결은 이 뉴스를 접하고 자살 충동이 심할 때만 복용하는 약을 일주일에 네 번 먹어야 할 정도로 정신 상태가 악화된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나비가 말한다. 얼마 전에 스위스에서 가족들과 함께 활짝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존엄사한 사람을 봤다고. 한결이 혼자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고.

죽을 때까지 여성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자살할 수 없었다는 트랜스 남성, 한결.
나비는 한결이 레즈비언인 줄 알았으나 한결은 말한다. "엄마, 나는 트랜스젠더야." ⓒ(주)엣나인필름

“네가 만약 정말 죽고 싶으면, 내가 너랑 같이 스위스를 가서, 죽는 순간에,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그렇게 가는 길을 내가 지켜줄게. 저한테는 얘가,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해요.”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부모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면, 부모의 자리는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당위를 넘어서, 아이가 죽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로서 함께 하겠다니. 우리 사회는 어머니가 되어서 자식을 앞세우는 선택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곳이었구나. 도대체 우리 사회는 왜 한 어머니가 이토록 강인해지도록 몰아세우는 걸까.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부끄러웠다.

이렇게 쓰니까 영화가 슬프고 비장하기만 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녀들의 커밍아웃은 처음에는 나비와 비비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결국에 이들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예준이 유학하는 나라 캐나다의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한 어머니 비비안.ⓒ(주)엣나인필름
아들 예준이 유학하는 나라 캐나다의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한 어머니 비비안.ⓒ(주)엣나인필름

27년차 항공 승무원 비비안은 아들 예준이 유학하는 캐나다로 날아가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한다. “I love my gay son”이라고 쓴 종이를 자랑스럽게 들고 수많은 인파의 환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행진한다. 비비안은 말한다. 엄마인 나도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니 이렇게 기쁘고 신나는데, 당사자인 아들은 그 희열이 더하지 않겠냐고.

당사자. 비비안은 이성애자이자 ‘정상 가족’을 이룬 기혼자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주류에 속한다. 아마 자신의 삶이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수많은 비행을 하면서 외국인 게이들을 봤음에도 아들이 게이일 거라고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비비안은 성 소수자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딛고 선 땅이 아예 다르다.

예준과 그의 애인은 예준 부모의 집에 초대 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주)엣나인필름
예준과 그의 애인은 예준 부모의 집에 초대 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주)엣나인필름

아이가 속한 세계에 영원히 어머니는 입장할 수 없다. 그 한계를 명확히 인지한다. 그 대신 어머니는 어머니가 속한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아이가 자기 세계에서 행복하게 생존하기를 응원하고, 혐오가 넘쳐나는 사회와 맞서 싸운다.

이렇게 쿨하고 명철한 비비안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들의 커밍아웃 이후 엄마는 너무 슬프다면서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게 낳아줘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훔쳤다. 세상에는 세모도 있고, 네모도 있고, 동그라미도 있는 건데 네모로 태어난 아들에게 ‘네가 네모라서 엄마는 슬퍼. 네모로 낳아줘서 엄마가 미안해.’라고 말한다면 듣는 네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네모로 태어난 건 잘못이 아닌데.

한국의 퀴어 문화 축제에 참가한 나비와 비비안. 내 아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었다니, 놀라고 분노하며 투사가 된다. ⓒ(주)엣나인필름
내 아이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었다니, 나비와 비비안은 분노하며 자연스럽게 투사가 된다. ⓒ(주)엣나인필름

비비안이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도대체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자기혐오와 부정의 시간을 혼자 견뎌온 걸 생각하고 정신을 차렸다고. “얘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뒷전이고 우선은 (이해한 척)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모가 자녀를 보호한다는 게 이런 광경 아닐까. 부모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자식의 펄펄 끓는 고통이 눈앞에 있을 때, 부모는 자식의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 그것이 어른이자 부모이자 양육자의 의무다. 가족은 모든 속내를 공유해야 한다고 누가 말하나.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줬을 때, 그것이 아이에게 상처가 된다면 가면이라도 쓰고 연기를 해야 한다. 그것이 아이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존중하는 방법이다.

퀴어 문화 축제에서 '프리 허그'를 해 주고 있는 나비. 내 자식만이 아니라 남의 자식까지 안아주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주)엣나인필름
퀴어 문화 축제에서 '프리 허그'를 해 주고 있는 나비. 내 자식만이 아니라 남의 자식까지 안아주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주)엣나인필름

아이가 내 예상에 들어맞는 행동만을 하고, 아이의 성취가 부모의 트로피가 될 때, 부모의 사랑은 얼마나 쉽고 달콤한 것인가. 성 소수자 부모들 사이에서는 자녀의 커밍아웃을 ‘폭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이가 ‘폭탄’을 던져 부모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 때, 영화는 부모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비비안은 예준의 커밍아웃이 폭탄이 아니라 선물이었다고 고백한다. 아들을 통해 중년에 크나큰 성장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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