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언젠가 빈 둥지가 되겠지만...
나도 언젠가 빈 둥지가 되겠지만...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3.06.0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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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보이후드’(2014)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 다양한 동요를 많이 배워온다. 요즘 나를 가장 뭉클하게 한 동요는 바로, ‘나도 어른이 되겠지’다.

‘나도 어른이 되겠지/틀림없이 어른이 되겠지/엄마를 쏙 빼어 닮은 어른일 거야/엄마처럼 따뜻한 어른일 거야’

대체로 이성이 부족하고 감정이 넘치는 나는, 아이들이 포도알 같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작은 입에 힘을 주며 이 노래를 불러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만 4년 동안 쑥쑥 커서 100cm를 넘기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내 품에 쏙 들어오는 아이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겠지.

12년 동안 촬영하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영화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12년 동안 촬영하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영화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영화 ‘보이후드’(2014)는 현재 4살인 쌍둥이들이 커가는 과정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조금은 해소시켜주는 영화다. 이 영화는 실제로 6살 배우가 18살이 될 때까지 12년 동안 매년 만나 15분 분량을 촬영했다.

양육자로서 어쩔 수 없이 가장 눈이 간 역할은 메이슨과 사만다의 어머니 올리비아였다. 이들 남매의 아버지이자 올리비아의 첫 번째 남편은 어린 나이에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결혼했지만 생계유지에 관심이 없다. 올리비아는 그와 이혼하고 싱글 맘으로 살다가 재혼하지만, 두 번째 남편이 가정폭력을 저지르자 이들 남매를 데리고 도망친다. 짐도 못 챙기고 몸만 겨우 나와서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된 사만다가 당장 살 집도 없고 이 꼴이 뭐냐고 소리를 지르자 올리비아도 맞받아친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에단 호크가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남자친구가 생긴 딸에게 절대 자기처럼 준비되지 않은 임신을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에단 호크가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남자친구가 생긴 딸에게 절대 자기처럼 준비되지 않은 임신을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올리비아는 정말, 최선을 다한다. 애 둘을 키우면서 더 나은 일자리를 잡기 위해서 대학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된다. 교수 생활을 하던 중 전직 군인이었던 제자와 사랑에 빠져 세 번째 결혼을 하지만, 그도 경제적인 상황이 안 좋아지자 폭력적인 면을 보이며 메이슨 남매를 괴롭게 한다. 올리비아는 세 번째 이혼을 하고 혼자 남매를 성인으로 키워낸다.

첫째 사만다가 대학 진학을 하며 독립하고, 둘째 메이슨까지 대학생이 되자 올리비아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 갈 테니 너희 짐을 다 정리하라고 한다.

“내 할 일은 끝났어.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해볼 거야. 난 널 둥지에서 내보내려는 거야. 얼굴 펴. 너희도 이젠 어른이야. 스스로를 책임질 나이라구.”

나라면 막내까지 집을 떠나면 홀가분하면서도 눈물을 질질 짜고 있을 것 같은데, 미국 엄마들은 저렇게 쿨한 건가! 나는 이 장면에서 적잖이 놀란 동시에 통쾌했다. 그래, 지금은 대체로 이성이 부족하고 감정이 넘치지만, 15년 후엔 올리비아처럼 씩씩한 엄마가 돼야지!

아이들과 잠자리 독서하던 엄마 올리비아.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아이들과 잠자리 독서하던 엄마 올리비아.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서 메이슨이 진짜 이삿짐을 싸자 올리비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울기 시작한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떠날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신이 나서 갈 줄은 몰랐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슬픈 장면에서 난 슬며시 웃음이 났다. 나만 구질구질한 게 아니었어. 혼자 일하고 애 둘이나 키우면서 공부해서 교수되고, 자기 자식들을 가정 폭력의 위기에서 빼낸 강하디 강한 저런 여자에게도 빈 둥지가 되는 건 두려운 일이야!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은 그 다음 장면이었다. 올리비아는 인생에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고 머리를 감싸안고, 카메라는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는다. 줌 인도 줌 아웃도 없이, 그냥 그 장면은 끝나버린다. 그리고 메이슨은 집을 떠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 하이킹을 간다. 메이슨이 오늘 새로 만난 니콜과 저녁 빛에 잠겨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165분의 긴 영화는 끝을 맺는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니콜과 대화하는 메이슨.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니콜과 대화하는 메이슨.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엄마는 이들 남매를 떠나보내고 절망하지만, 메이슨의 삶은 엄마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그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부모가 슬프다고 자식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고, 부모가 마음 쓰여 자식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해도 안 된다. 메이슨은 완전히 새로운 모험의 입구에 서 있고, 그는 홀로 저벅저벅 그 문 너머로 걸어간다.

메이슨 역을 맡은 배우 엘라 콜트레인의 성장 모습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메이슨 역을 맡은 배우 엘라 콜트레인의 성장 모습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유)

그렇다면 ‘빈 둥지’가 된 올리비아가 정말 공허하기만 할까. 나는 올리비아의 진짜 삶은 ‘내 장례식만 남았어!’와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해볼 거야’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올리비아에게는 엄마로서의 삶도 있었지만, 교수, 친구, 딸, 생활인 등 엄마 아닌 역할로서의 삶도 여러 겹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나도 어른이 되겠지’ 노래 가사만 들어도 가슴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지는, 사랑 넘치는 엄마도 분명 내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아이들이 세 돌이 될 때까지만 해도 ‘애들이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는 말에 진심으로 공감해본 적이 없다. 시험관 여덟 번에 난임 에세이까지 출판하며 떠들썩하게 엄마가 됐지만, 어쩌면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엄마가 돼서 아이들의 존재가 버거웠다. 너무 소중한데 너무 작고 약해서, 내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애들이 잘못될까 봐 불안하고 무서웠다.

이렇게 숨어 있으면 친구들한테 자기 모습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아직 네 살. ⓒ최가을
이렇게 숨어 있으면 친구들한테 자기 모습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아직 네 살. ⓒ최가을

아이가 ‘나도 어른이 되겠지’라고 노래하면 나는 속으로 ‘나도 언젠가 빈 둥지가 되겠지’ 라고 중얼거려본다. 우리 아이들도 메이슨 남매처럼, 내가 눈물을 찍어 바르고 있어도 뒤돌아보지 말길 바란다. 눈물 안 흘릴 거라고는 말 못하지만, 나도 너희 가고 나면 빈 둥지로 나무에만 우두커니 앉아있진 않을 거야. 빈 둥지는 가벼우니까, 이 엄마도 강이나 바다로 둥둥 떠다니면서 새로운 세상을 볼 거라구. 그때까지는 이 둥지에서 복닥거리면서 찐하게 함께 지내자!

※ ‘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칼럼 연재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실어주신 ‘베이비뉴스’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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