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내일 아점 먹고 쇼핑 가자. 애들 옷 좀 사게."
"글쎄... 나는 내일 오후에 할 일 있는데?"
"(갑자기 약속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무슨 할 일? 누구 만나?"
"아니, 잡채랑 육전 해야지."
"(소파에 앉아 있던 딸 둘과 나 일제히) 그게 할 일이었어? 하하하."
아이들이 "아빠, 완전히 주부 모드 아냐?"라며 또 웃는다. 나도 옆에 있었지만 남편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실 그 잡채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 할 일 있어 쇼핑 못 간다는 남편
할 일 있어서 쇼핑 못 간다는 남편의 할 일은 사실 내가 벌인 일이었다.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토요일 오전,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별일 없으면 연휴도 길고 하니 일요일 저녁쯤 와서 밥을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명절 당일에 수원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그 후에 날을 잡아 어머니 댁에서 한 번 더 밥을 먹는 게 우리 집 명절 식순 같은 거였다. 올해는 명절 이후 하루 밖에 쉬지 않으니 미리 집에서 밥을 먹자고 하신 거였다(이게 가능한 것은 시댁과 우리 집은 한 동네라고 하기에도 너무 가까운 거리다).
"그럼 어머니 저도 뭐 좀 해갈까요?"
"뭐 딱히 할 건 없는데... 그냥 와서 먹던 거 먹으면 된다."
"그래도 가서 먹고만 오기가 좀 그런데... 혹시 잡채 하셨어요?"
"잡채는 안 했는데..."
"아, 그럼 제가 잡채 해 갈게요."
"그럴래? 그래라. 그럼."
"네!"
자신 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이러는 데는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바로 남편. 얼마 전에 잡채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 남편이 잡채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잡채 뭐 별 거 있나? 야채 썰어서 볶고 면 삶고 버무리기만 하는 되는 거잖아?' 나는 재료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남편이 버무리면서 간을 보면 딱이겠다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부부가 같이 만들지만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만든(!) 것으로 변한 잡채 미션의 시작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20년 차 주부. 그런데도 잡채 재료를 준비하면서 약간 혼란이 왔다. 자주 해 먹지 않아서 그렇다. 당근을 어슷 썰기를 했던가, 그냥 썰었던가? 3초간 고민하다가 동그랗게 썰었다. 채 썰면서 그 선택을 약간 후회했다. 당면과 야채를 같이 먹으려면 길게 썰어야 좋겠네, 라는 생각이 뒤늦게 도착한 것. 뭐, 어때. 남편이 내가 채 써는 걸 보고 어슷 썰기를 알려줄까 하다가 말았단다. 역시... 우리는 서로 고수다. 나도 남편이 음식 할 때 어지간해서는 토를 달지 않는다.
다음엔 양파. 이건 자신 있다. 나는 양파를 얇게 잘 썬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엄마 때문이다. 엄마가 나 어릴 적 자주 해준 떡볶이에는 양파가 늘 수북했다. 양파를 떡볶이랑 같이 먹을 때 아삭 하고 씹히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요리할 때 양파를 즐겨 사용했다. 자주 해봐서 그런가. 착착착 소리를 내며 양파가 얇게 썰릴 때 기분이 좋다. 요즘 제철인 시금치는 어머님이 삶아 주셨다. 마침 집에 해둔 게 있다고 가져 가서 쓰라고 하셔서 남편이 가져왔다.
목이버섯도 한 팩 사서 불려 넣었다. 우리는 그냥 통째로 넣었는데 나중에 어머님이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먹기 좋게 손으로 찢어서 넣으면 더 좋다고 하셨다. 그걸 몰랐네. 우린 통째로 먹는 건 줄 알았다. 당면도 물에 불렸다가 삶았다. 간장 양념은 남편이 했다. 당면 양보다 야채 양이 더 많아 보였다. 야채를 좀 덜었다. 연휴에 한번 볶음밥용으로 쓰면 될 것 같았다. 고기는 정육점에서 산 길게 썬 소고기를 준비했다.

별 어려움 없이 완성! 소파와 주방을 어중간하게 왔다 갔다 하다가 간을 보라는 남편의 말에 후루룩 먹어보니, 이 맛이다. 남편의 잡채 맛. 어머니, 아버지도, 아이들도, 우리 부부도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다시 채워 먹을 정도로 맛이 괜찮았다(짜게 드시는 아버지 입맛에는 좀 싱겁다고 하셨지만 건강을 위해 심심한 게 좋은 거다).
◇ 뭘 먹을지 함께 고민하는 부부
남편이 본격적으로 주방에 입성하기 시작한 건 코로나 때문이었다. 당시 남편과 나는 1년 정도 함께 재택 했다. 같이 일하면서 식사 준비를 나만 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못할 짓이지 않나. 그때는 아이들도 집에서 수업을 들었다. 아침은 간단히 먹는다고 해도 점심, 저녁은 온전히 나 혹은 남편이 책임져야 했다. 사 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혼선 끝에 남편이 점심을 맡고, 퇴근이 이른 내가 저녁을 맡았다.
남편의 손맛은 시어머니에게 온 것으로 보인다. 친정엄마 음식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나는 시어머니 음식이 입에 맞았다. 남편이 해준 음식도 그랬다. 나는 남편이 해준 음식을 늘 맛있게 먹었다. 거짓이 전혀 없는 사실이다. 남편과 나는 음식 하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남편은 절대적으로 레시피에 나오는 대로 계량하고 나는 눈대중으로 한다. 그래도 둘 다 싫은 소리 없이 잘 먹는다.
음식을 하는 남편과 그렇지 않은 남편은 아내 입장에서 천지 차이라고 본다. 나는 외출할 때 끼니 걱정을 해 본 적이 없다(심지어 애들이 분유 먹고 이유식 먹던 때도 그랬다). 평일 메뉴는 주로 내가 고민하지만, 주말엔 아점을 먹으면서 남편과 함께 저녁 메뉴를 고민한다. 저녁을 먹으면서는 내일 아침 메뉴를 함께 생각한다.
주로 시간이 되는 사람이 주로(요즘엔 남편) 요리를 하고 요리할 시간이 안 되는 사람이 설거지를 한다. 요리라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우리 부부는 거의 단품 요리를 해서 밥을 먹는다. 오징어볶음을 하는 날이면 넓은 접시에 오징어볶음과 밥을 함께 내놓는다. 두부조림을 해도 그렇다. 밑반찬이 있으면 있는 대로 먹고 없으면 없는 대로 먹는다. 국도 고집하지 않는다. 김치볶음밥을 하면 반찬 없이 먹을 때도 많다.
한창 먹고 싶은 게 많은 아이들이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을 말할 때마다 서로 마음이 상해서(재료가 없으면 해 주기 어렵거니와 장을 볼 시간도 없어 엄마는 화가 나고, 먹고 싶은 걸 못 먹어서 아이는 속이 상한다) 큰 원칙도 세웠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미리 말하기. 장 볼 때 미리 재료를 준비해 두면 만드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아서다. 단, 갑자기 먹고 싶은 걸 말했는데, 재료가 없을 때는 그냥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고 아예 못을 박았다.
둘째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식사 시간에 아이들이 해야 할 일도 가르쳐 주었다. 식사 준비를 할 때는 가급적 수저와 숟가락을 놓고, 다 먹었으면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다 두는 것만으로도 엄마아빠를 도울 수 있다고. 맞벌이 입장에서 이런 시스템은 진짜 최고다. 가사 일은 단연코 엄마만의 몫이 아니다. 전업 주부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새해에는 더 이상 그림책 〈돼지책〉을 보고 양심에 찔리는 가족들이 없기를 바란다. 이 그림책을 모른다고? 그렇다면 이참에 일독을 권한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편집기자로 일하며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성교육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일과 사는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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