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면, 내 인생은 끝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되면, 내 인생은 끝난다고 생각했다 
  • 칼럼니스트 윤정인
  • 승인 2020.02.0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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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과학자 생존기] 엄마 되는 것이 그렇게까지 두려웠던 이유는 사실…

임신을 확인한 후, 나는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이 어려웠다. 주변 동료들에게 알리는 일은 오히려 편했는데, 이상하게도 식구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려니 맘이 편치 않았다. 아마도 나의 임신 사실이 우리 가족들에게 엄청난 이슈가 될 것을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도 우리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내가 속한 연구실의 박사님들 역시 “이 결혼 반댈세!”를 강하게 어필하셨다. 이유는 나의 가장 첫 번째 칼럼에도 서술해 놓았는데,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공부하는 여자, 혹은 아들보다 더 공부한 며느리를 싫어할 시댁.’

‘애 엄마는 오래 연구직에서 일할 수 없어.’

우리 집 어른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 내가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리라 걱정하셨을 것이고, 나의 지도 박사님들은 자신의 여자 동기들이 결혼 후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자신과 전공이 같은 배우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았기에. 나 역시 그러한 삶을 살까 많이 저어되었으리라….

모두가 나를 걱정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걱정됐다. 하지만 결혼 후 누군가의 배우자로 사는 3년은 사실 어려운 일이 없었다. 결혼을 통해 새롭게 생긴 가족들을 챙기는 일도 각자가 알아서 하기로 했으므로. 딱히 불편한 것도, 또 어려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아주 두려웠다.

◇ 엄마라는 ‘실험’에는 내가 적용할 수 있는 ‘참고문헌’이 없었다 

그 어떤 위험한 실험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라는 '실험'에는 내가 참고할 수 있는 문헌이 없었다. ⓒ베이비뉴스
그 어떤 위험한 실험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라는 '실험'에는 내가 참고할 수 있는 문헌이 없었다. ⓒ베이비뉴스

자칫하면 불이 날 수도 있는 실험도 무던히 해내던 간 큰 내가 엄마 되는 게 그렇게 무서웠던 이유는 한 가지다. 엄마라는 삶의 ‘참고문헌(Reference)’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문헌을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험하고,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하면 되는 것이라 부담스럽지 않았다. 위험한 시약은 시약 정보에서 위험성을 알려주기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게 없다.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 내게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나의 상황이 변한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당시 나는,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여자 선배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다. 대학원생이 아이 엄마인 경우가 애초에 하늘의 별 따기였다. 대부분의 여자 박사님들은 결혼 후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아이를 갖지 않는 맞벌이 부부)’이 되거나, 혹은 아이가 있어도 친정 부모님 찬스, 시부모님 찬스, 베이비시터 찬스 등 내겐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가 있었기에 나처럼 직접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 드물었다.

하지만 엄마가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가장 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나의 가까운 곳에서 ‘엄마’라는 삶과 ‘자신’이라는 삶 사이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의 삶을 지켜봐 왔다.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무 잘 알기에, 그래서 엄마가 된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의 고모다.

◇ 내 기준 제일 멋진 여자였던 우리 고모, 결혼하더니 사라졌다 

멋진 전문직 여성이던 우리 고모는 결혼 후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이들 돌보느라 발 동동 구르는 '엄마' 그리고 '며느리'만 남았다. ⓒ베이비뉴스
멋진 전문직 여성이던 우리 고모는 결혼 후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이들 돌보느라 발 동동 구르는 '엄마' 그리고 '며느리'만 남았다. ⓒ베이비뉴스

1964년 용띠. 연세대학교를 졸업해 그 시절에 무려 프랑스 유학도 다녀왔다. 유학을 마친 후 대기업을 다니며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살던 고모는 어린 내가 만난 여자 중 우리 엄마만큼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멋있던 고모가 결혼 후에 달라졌다. 고모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고모부와 함께 미국에 간다고 했다. 귀국한 고모는 더는 대기업에 다니지 않았다. 학위가 필요하다며 다시 대학원에 다녔고, 그러는 사이 아이들이 생겼다.

고모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늘 운전을 했다. 그리고 시간 강사가 되어 강의를 다닌다고 했고, 학원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쳤다. 언젠가는 또 사업을 한다고도 했고… 우리 고모는 결혼 후 늘 바쁘게 동동거리며 지냈다. 내가 아는 여자 중 가장 멋진 커리어우먼이던 고모가 결혼 후에 사라졌다. 

고모부가 좋은 회사로 옮기고 승진을 하는데, 고모의 직업은 계속 변했다.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지내던 10대 때는 그저 고모가 회사원 말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을 하려나 싶었다. 고모가 왜 친정엄마인 할머니와 함께 사는지도 크게 생각 안 해봤다. 그냥, 고모가 할머니랑 함께 살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에 고모는 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사에 진학했는데, 고모가 별안간에 박사과정을 포기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고모부의 엄마가 편찮으셨다고. 왜 할머니와 아빠와 엄마가 그 소식에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당시의 나는 이해를 못 했다. 그렇게 나의 20대가 흘러갔다.

내가 대학원에 간다고 하던 날, 고모는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꼭 박사 마쳐. 박사 마치기 전까지는 결혼은 절대 생각도 하지 마.”

고모의 삶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대학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신랑의 가족과 결혼으로 가족이 된 뒤, 나에게도 시댁이란 곳이 생겼다. 그제야 고모의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배우자의 강한 지지가 없으면 며느리란 존재가 당당해지기는 어려운 게 대한민국이었다. 왜 인터넷에 그렇게 시댁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학위를 마칠 때까지 돕겠다는 배우자의 약속이 있었다. 공부하는 와이프를 지지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신랑의 커버로 나는 무사히 공부할 수 있었다.

◇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네 일, 절대로 포기하지 마”

엄마가 그랬다. "결혼하고, 아이 낳아도 네 일 포기하지마. 이혼해도 괜찮으니 절대로 굽히지 마." ⓒ베이비뉴스
엄마가 그랬다. "결혼하고, 아이 낳아도 네 일 포기하지마. 이혼해도 괜찮으니 절대로 굽히지 마." ⓒ베이비뉴스

그래, 나는 운이 좋았다. 그래서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우리 고모가 겪은 일은 고모가 대한민국의 ‘평균 며느리’였기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고모를 이해하고, 또 고모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우리 엄마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당신의 딸들이 고모처럼 직업을 갖고, 공부를 많이 하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겨도 일을 하길, 그래서 남편에게, 또 시댁에 당당하길 바라셨다. 그러니 너희는 버티라고 하셨고, 만약에 고모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혼해도 괜찮으니 굽히지는 말라고 하셨다. 

나는 결혼하고 나서야 포기하지 말라던 엄마의 마음도,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갈 것 같은 조카를 걱정했던 고모의 마음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고모의 삶을 이해하면서 나는, 고모가 늘 다양한 일에 도전했던 것이 고모가 결국 엄마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또 고모가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할머니와 함께 살며 ‘할마 찬스(할머니 엄마 찬스)’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진짜라면, 할머니 육아 찬스가 불가능한 내 상황에서 임신은 ‘적색경보’가 확실해 보였다.

임신하고, 어린이집 알아보고, 출산휴가며 기타 등등 정책을 알아보면서 고모 생각이 참 많이 났다.

고모가 아이들을 키우던 때는 내가 임신한 2014년보다 더 척박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돌봄공백이야 말할 것도 없고, 출산휴가도 두어 달가량 됐을까? 그거라도 있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책임감이 강한 우리 고모의 성격상 아이들을 책임지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을 테다.

과중한 업무에 치여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던 고모부를 대신해 독박육아를 감수했던 고모는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간신히 이어가던 경력 또한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다양하게 변한 고모의 직업은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친 증거였다.

아이 엄마가 되고서야 고모의 삶을 이해한다. 그리고 아이가 여섯 살이 된 지금, 고모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과학자로서 경력과 엄마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두 번의 선택을 했다. 나 역시 간신히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를 젓고 있다. ‘엄마 과학자’라는 이름을 유지한다는 것, 정말 쉽지 않다.

주변에서 아이 키우는 문제로 내게 많이 물어온다. 나는 늘 이렇게 얘기한다.

“아이는 직접 키우는 게 좋긴 하죠. 아이와 부딪히며 힘들지만 나 역시 부모로서 성장할 수 있잖아요. 그보다 더 소중한 기회는 없다고 봐요. 하지만… 힘들어요. 정말 힘들고… 육아는 아름답지 않아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냥 받으세요. 그리고 받으려거든 ‘제대로’ 받으세요.”

자신의 경력을 갈아 넣어 육아한다고 해도, 아이라는 존재는 내게 행복만을 선사하지 않는다. 솔직히 대화도 잘 안 되는 아이와 종일 대화를 이어 가기도 어렵다. 나는 그래서 되도록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특히 나처럼 예상하지 못한 야근이 잦은 연구직일수록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것이 좋다. 연구는 한번 확실히 꽂히면 ‘쫘아악’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보통 그 시간이 되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서 실험을 정리해야 하는 경우도 너무 많다. 

◇ 나는 결국 엄마가 됐다, 그리고 이 세상의 천장을 나의 아이와 함께 깨부수려 한다

엄마가 됐다. 인생이 끝나지도 않았다. 대신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의 유리천장을 깨부수려 한다. 나의 아이와 함께, 망치를 들고. ⓒ베이비뉴스
엄마가 됐다. 인생이 끝나지도 않았다. 대신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의 유리천장을 깨부수려 한다. 나의 아이와 함께, 망치를 들고. ⓒ베이비뉴스

아무튼, 나는 세상이 아무리 좋아진다고 한들 여자에서 엄마로 변하는 순간 겪어야 할 일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와 가장 가까운 윗세대를 보며 은연중에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혼에 부정적인 10대를 보내고, ‘엄마’라는 말에 기겁하는 20대를 보냈다. 

그때는 엄마가 되면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사실 지금 보면 인생이 끝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엄마를 경험했기에 유리천장이라는 단어에 크게 관심도 없던 내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더 관심을 두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요즘은 유리천장이란 말도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한다. 미혼일 때야 유리천장이지, 엄마가 되는 순간 ‘다이아몬드 천장’이 되어 내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미혼일 때도 유리천장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래서 나는 ‘다이아몬드 천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라는 나의 ‘핸디캡’을 받아들이고, 아이 손에 망치를 쥐여주어 내 목에 태운 뒤 아이와 함께 천장을 두드리려고 한다. 나와 우리 아이가,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함께 그 천장을 두드리다 보면 좀 더 빠르게 천장에 흠집이 나지 않을까?

오늘의 글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자 사람’ 우리 고모와 엄마에게 바친다. 늘 애정하고 존경한다.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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