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족한 아빠와 사춘기 딸이 함께 여행을 떠났다
2% 부족한 아빠와 사춘기 딸이 함께 여행을 떠났다
  • 칼럼니스트 엄미야
  • 승인 2019.10.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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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미야의 일하는 엄마의 눈으로] 이 여행, 괜찮을까?

남편과 딸의 여행 짐을 싸면서 중얼거렸다. 

“시작부터 엉망진창이구나.”

중학생 여자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옷이고 하나는 사진이다. 인스타그램에 얼마나 예쁜 여행 사진을 올리느냐가 아이에게 중요하다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나는, 그저 공항을 빠르고 간단하게 통과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여행용 캐리어가 아닌 등산배낭에 짐을 싸달라는 남편에게 짜증이 났다. 

얼마 전 남편은 호기롭게 큰아이와 단둘이 떠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설계했다. 그 여행은 출국 3일 전, 남편이 갑자기 비행기 표를 끊는 것에서부터 불안하게 시작됐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여행은 남편과 아이들이 엄마인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형태였는데. 그래, 스스로 해보시길. 이 여행을 통해 부녀 관계도 돈독해지리라. 

그런데 웬걸. 여행의 즐거움은 준비하는 데서부터 시작이라는데, 준비하는 데서부터 삐걱거린다. 저렴한 항공편을 찾다 보니 출입국 시간이 꼭두새벽이나 야밤이다. 여행지 숙소로 독립된 현지 아파트를 선호하는 나와는 달리 3급 호텔이라도 조식이 나와야 하는 남편은 내가 예약한 숙소가 맘에 안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여행 준비에 손을 뗐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둘이 해내라. 

결국, 저 둘은 내 복장만큼이나 터질 듯한 배낭을 각자 짊어진 모습으로 비행기를 탔다. 나는 공항에서 손을 흔들며 남편과 아이를 보냈다. 아아, 이제 진짜 내 손을 떠났구나.

여행 둘째 날 사진을 받아 보니 아이가 계속 같은 옷만 입고 있다. 아마 추워서인 것 같다. 캐리어에 쌌던 짐을 배낭에 옮겨 싸다 보니 두꺼운 옷을 몇 개 챙기지 못해서 가지고 간 옷을 있는 대로 껴입은 모양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었어야지! 남편에게 다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기념품 가게에 들러 애 쇼핑하게 해주라는 말에 남편의 답장은 이랬다. 

“여기 물가 비싸.”

도대체 아이의 여행 취향을 생각하긴 하는 건지. 보내오는 사진이 죄다 길에서 걷는 사진이다. 무슨 러시아 국토대장정 갔니? 아빠는 신나 보이는데, 아이 표정은 글쎄, 잘 모르겠다. 둘은 과연 이번 여행이 재미있었을까? 둘의 ‘케미’는 어땠을까?

터질것 같은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 내내 똑같은 옷 껴입고…아이고 내 복장이야! ⓒ엄미야
터질것 같은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 내내 똑같은 옷 껴입고…아이고 내 복장이야! ⓒ엄미야

◇ 언젠가부터 남편 없이 아이들과 떠나는 여행이 편했다 

나는 아이 둘을 낳고 단 한 번도 산후조리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도 아이를 기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사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누구 편하라고’쯤이 더 적절한 표현일 수 있겠다. 

아이가 밤에 안 자고 보채면 엄마만이 아니라 남편도 못 자야 하고, 손목은 함께 아파야 한다고.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는 사실은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다행히 남편은 별 불평불만 없이 이를 받아들여 우리 아이들은 아빠의 손도 많이 타며 자랐다. 그런데 오히려 가끔 아이와 남편을 분리하는 건 엄마인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아이를 기르는 데 있어선 내 방식이 옳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엄마만 없다 하면 배달 음식에, 아이한테 라면 끓이라고 시켜 먹고, 시골에 데려가더니 애가 팔이 하나 부러져서 오고, 운동하자고 데리고 나가서는 애를 무슨 극기훈련이라도 하다온 애처럼 녹초를 만들어 놓고, 외식은 무조건 감자탕.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들지 않아 한때는 남편이 시간이 있음에도 남편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아이들 고모에게 아이를 부탁했던 적도 많았다. 

여행도 그랬다. “애들은 엄마랑 다니는 걸 더 재밌어해”라는 생각에 아빠 없이 다녔던 여행이 많았다. 물론 남편이 바쁘기도 했지만, 사실 나도 그게 편했으니까. 그래놓고 책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도 다정하고, 친근한 부녀지간을 바랐다.

공항에서 쪽잠자는 딸의 모습. 공항에서도 내 집처럼 잘 자는 우리 아이. 적응력 하나는 인정. ⓒ엄미야
공항에서 쪽잠자는 딸의 모습. 공항에서도 내 집처럼 잘 자는 우리 아이. 적응력 하나는 인정. ⓒ엄미야

 ◇ 남편 못 미덥다는 이유로 아이와의 관계 독점해온 것은 아닐까

관계는 보내는 시간과 비례하는 것 같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서는 관계를 얻을 수 없다. 돌아보면 아이와의 관계를 독점할 권리가 나에게는 없는데, 남편이 못 미덥다는 이유로, 내가 더 잘한다는 이유로 아빠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는지도.

남편과 딸이 함께 떠난 이번 여행은 ‘이번 판은 나가리’ 인 여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허름한 호텔에, 싸구려 음식들만 먹으러 다니고, 돈 아낀다고 걸어만 다녔을 수도 있다. 기념품도 하나 못 사게 해 아이 입이 댓발 나왔을지도 모른다. 디저트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꿨을 수도 있다. 새벽 비행기 기다리느라 공항에서 쪽잠 자고, 여행 내내 같은 옷차림으로 사진을 찍어서 짜증이 났을 수 있지만, 그런저런 에피소드와 감정들이 둘만의 또 다른 관계와 추억을 만들어냈을 거라 생각한다.

딸을 키우는 아빠들이 종종 하는 질문이 있다. 

“아이가 언제까지 아빠랑 놀아주나요?”

우리는 보통 초등학교까지, 혹은 더 어린 나이까지라고 ‘퉁’치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몇 년 전 스무 살 조금 넘어 보이는 딸과 아빠가 둘이서 캠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가장 애매한 대답이지만 ‘하기 나름’이다. 여기엔 아빠가 하기 나름만 있다는 뜻이 아니다. 엄마에게도 그들의 관계에 적당한 거리 두기, 놓아두기가 필요하고, 아이도 2% 모자란 아빠에게 적응하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젠 난 틀렸어'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아이와 손을 잡고 나서는 이 땅의 모든 아빠에게 건투를 빈다. 

러시아 국토대장정이라도 하듯이 걷고 또 걷던 여행. 즐거웠니? ⓒ엄미야
러시아 국토대장정이라도 하듯이 걷고 또 걷던 여행. 즐거웠니? ⓒ엄미야

*칼럼니스트 엄미야는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두 딸의 엄마다. 노동조합 활동가이자, 노동자 남편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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