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예술치료사 강서영의 ‘아하, 그랬구나!’ 나와 가족의 모습
며칠 전의 일이다. 아침에 먹을 반찬으로 달걀말이를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달걀껍질을 깨다 딴 생각을 하는 바람에 알맹이를 통째로 개수대에 빠뜨리고 말았다. 당황스런 마음에 울상을 지으며 남편에게 말하자,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은 “응, 당신은 처음이구나?”라며 경험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꼼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편이 같은 실수를 했다니. 잠시 치매를 걱정하던 필자는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어색함과 긴장을 견디지 못해 습관적으로 웃어대는 사람과 유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사이에는 백짓장 한 장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둘 다 부자연스럽고 경직된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삶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과 지나친 경직성이나 완고함의 차이를 명백히 구분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후자는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처럼 괴팍하고 각박하다는 인상을 준다.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심각하게 해치는 사안이 아니라면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작은 서운함이 쌓이면 큰 원망이 되고 치사해서 꿀꺽 삼킨 억울함은 불어나 화병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유머다. 유머는 자신에게든 상대에게든 삐걱거리는 기계부속을 부드럽게 만드는 기름 같은 구실을 한다. 유머를 통해 드러낸 본심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앙갚음을 당할 염려가 없다. 농담은 적개심을 중화시키는 묘약이다.
유머는 자신에게 적용했을 때도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한다. “유머는 삶을 함축하고 부드럽게 만들며 일상적인 감동을 안겨준다. 거창함에 절대 반대하며 자기반성을 장려하고 자만심과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해준다. 땅의 말뚝까지 인도하는 유머는, 우리가 현실에 뿌리박고 살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분석심리학자 제임스 힐먼의 설명이다.
유머는 엄격하고 흘려보내지 못하고 내버리지 못하는, 스스로 짠 견고한 틀에 갇혀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유머 있는 삶은 쉽게 얻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유머집을 찾아 읽는 것 이상의 노력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삶을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면 여유를 잃고, 너무 떨어져보면 냉소적으로 되기 쉽다. 따라서 유머는 삶에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만 나의 것이 될 수 있다. 유머는 그저 웃어넘기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들은 경험이 부족해 예외적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들은 옹고집을 부리면서도 어른들의 사정을 헤아리는 데는 인색하다. “엄마가 그랬잖아요”라며 어른들의 말을 문장 그대로 생각한다. 탄력적인 사고보다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질 탓이건 자라난 환경 탓이건 유난히 원칙적인 태도를 갖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불확실한 것과 모순되는 것을 이해하거나 견뎌낼 힘이 없다.
대처능력 가운데 가장 성숙한 방식인 유머는 개인의 심리적인 성숙도와 비례한다. 아이가 탄력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부모가 먼저 여유를 갖고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세상을 배워나가는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가장 먼저 만나는 ‘세상’이 아니던가.
*칼럼니스트 강서영은 예술치료사이자 청소년 상담사, 한국표현예술심치치료협회 임상감독자로서 강서영 심리상담센터(www.일산심리치료.kr)를 운영 중입니다. 심층심리를 기반으로 한 예술심리치료로 아동, 청소년, 성인들을 만나고 있으며 좋은 부모되기가 부모자신의 인격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신념과 더불어 좋은 치료 역시 치료자 자신의 인격성장에 달려있다는 믿음으로 ‘이 순간을 잘 살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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