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은이와 은이 친구, 나는 한 달에 한 번 각각 에밀리(Emily), 로사(Rosa), 폴(Paul)이란 이름으로 변신한다. 셋이서 모여 앉아 별명을 부르며 지난 일상을 공유한 후 한두 가지 주제를 갖고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데, 주로 동화책의 일부분을 발췌해 생략된 앞뒤 이야기를 만들어보거나,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자신의 경험에 비춰 짐작하고 이야기를 상상한다.
지난주에는 「나무들의 밤」(The Night Life of Trees, 보림출판사, 2012년)이라는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은 바주 샴, 두르가 바이, 람 싱 우르베티라는 세 사람이 인도 중부 곤드족의 전설에 착안해 만들었다. 시각이 뛰어난 공동체로 알려진 곤드족은 숲에서 생활했기에 대부분 그림이 나무를 기초로 하고 있다. 여느 때처럼 뒤에서 앞으로 책장을 넘기던 우리는 '울타리 나무'에서 멈췄다.
"울타리 나무 : 키르세일 나무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감싸고 보호해줘요. 발을 둘러싸는 담, 집을 에워싸는 울타리로 쓰인답니다. 지붕에 얹는 널빤지, 출입구를 막는 문으로도 쓰이지요."(「나무들의 밤」 중에서)
그림을 보고 기분이 참 좋았다. 직업병처럼, 육아한 후부터는 무엇을 보든지 양육이나 부모와 지식의 관계로 연결하는 나는, 이번에도 나무 아래 새들을 보며 생각했다. ‘큰 새는 부모이고 작은 새는 자녀군. 왼쪽 둘은 서로 바라보고 있지만, 오른쪽 둘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네. 가만히 들여다보니 부모는 왼쪽처럼 자녀와 시선을 맞추며 감싸고 보호하는 울타리일 수도 있고, 오른쪽처럼 집을 짓거나 먹이를 잡아 오는 울타리일 수도 있겠다.’라고.
그래서 물었다.
(당당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에밀리, 로사~! 너희도 울타리 나무가 있어?”
“응? 울타리?”
“보통 부모가 울타리가 돼 어린 자녀를 지켜주잖아. 너희도 엄마, 아빠를 그렇게 생각해?”
“응…. 근데 우린 점점 자라는데, 울타리가 그대로라 조금 답답해. 어떨 때는 너무 좁아져서 목을 조이는 것 같아.”
“맞아. 나는 종종 뛰어넘고 싶어져.”
얼마 전 5살 빈이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식사하다가 움찔하며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도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후 빈이는 다시 등받이가 있는 의자를 고정자리로 앉게 됐다. 아이의 안전을 위함인데 뭔가 자율성을 빼앗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도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는 울타리가 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 은이가 훅 치고 들어왔다.
”(지금은 아빠가 아니라 '폴'인 나를 슬쩍 노려보고는) 우리 집에 아빠가 있는데… 같이 노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하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며 이를 설명하는 시간만 늘어났어. 또 막상 뭔가를 하려면 이런저런 방법에 잔소리를 늘어놓고….“
나는 재빨리 ”음… 그렇구나. 힘들겠다.“라고 호응한 후, 추가 공격을 받기 전에 후다닥 책장을 넘겼다.
황금빛 나무와 알록달록한 나무 그림을 지나 환한 나무 그림에서 다시 멈췄다.
"노래하는 나무 : 옛날에 곤드족 일곱 형제가 있었어요. 형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재산을 모두 나눠주고, 보통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싶었어요. 그러나 위대한 신이 막내의 꿈속에 나타나 말했어요. '너희가 세상에서 할 일은 사자 나무 아래 앉아서, 나를 기리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 뒤로 사자 나무는 노래하는 나무가 되었답니다."(「나무들의 밤」 중에서)
그림에 시선이 머무르는 동안 내 몸을 악기 삼아 매순간 노래하듯 살고 싶어졌다. 물론 나는 음치에 박치까지 겸비했기에 소리쳐 노래하지는 못하지만, '일상의 언어를 노래하듯 바꾸면 어떨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굵고 높은 목소리로 잘못을 지적하는 명령어가 아니라, 건강과 축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상상했다.
이어 뱀과 물고기 모양의 나무를 보며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서 책을 덮었다. 에밀리와 로사가 둘만의 놀이 시간을 갖는다며 자리를 떠난 후, 나는 잠시 부모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울타리여야 하나, 울타리가 아니어야 하나? 또 육아하면서 마냥 노래만 부를 수도 없고, 특히 인내심 면에선 함량 미달인데. 아~ 모르겠다.‘
울타리 나무와 노래하는 나무, 그 중간 어디 즈음에서 나와 같이 시소를 타고 있을 그대에게 이해와 공감의 마음을 담아 응원을 보낸다.
*칼럼니스트 윤기혁은 딸이 둘 있는 평범한 아빠입니다. 완벽한 육아를 꿈꾸지만 매번 실패하는 아빠이기도 하지요. 육아하는 남성, 아빠, 남편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은밀한 속마음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저서로는 「육아의 온도(somo, 2014)」, 「육아살롱 in 영화, 부모3.0(공저)(Sb, 2017)」이 있으며, (사)함께하는 아버지들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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