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 내가 많이 도와줄게.”
남편은 툭하면 저 소리를 잘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낳았을 때, 산후조리원 기간이 끝났을 때, 산후도우미 이용 기간이 끝나 ‘레알’ 독박육아가 시작됐을 때, 일을 다시 시작했을 때, 끊임없이 반복되는 육아와 가사에 지친 내가 “어떡하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뇔 때 남편은 옆에서 위로랍시고 저런 말을 했다.
한두 번은 그냥 ‘돕는다는 말을 하는 게 어디냐’ 싶어 가만히 뒀는데, 시간이 갈수록 들을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오빠가 육아를 왜 도와줘?”
“당연히 도와줘야지.”
“아니지. 오빠는 육아를 하는 사람이지,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지. 도와주는 사람은 우리가 돈 주고 고용하는 시터나, 가끔 오시는 시어머니나 내 동생이 도와주는 사람이지.”
“음, 그렇지.”
“그러니까 도와준다고 말하지 말고 오빠가 알아서 좀 해. 설거지하고 나면 싱크대 물기 닦고, 시간 되면 애들 밥도 먼저 챙기고, 애들 재운다고 들어가서 먼저 잠들어버리지 말고, 나 집안일 할 때 TV 보지 말고 애들하고 놀아주라고. 그리고 주말에 한 끼 정도는 나보고 해달라고 하지 말고 오빠가 먼저 좀 해보라고!”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래퍼처럼 나는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분노를 표출했다. 남편은 자칫 잘못하다간 싸움이 날 것이라 직감했는지 “아이 내가 또 언제 그랬냐~ 알겠어~”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에 내가 너무 쏘아붙인 것 같아 미안해졌지만 또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공대생이라 명령어를 입력해줘야 해”라던 남자, 지금은?
아기를 낳고, 주말부부였을 때 남편이 출근하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 되면 남편이 집에 오는 금요일 저녁만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남편은 평일에 쉽게 만나기 어려운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토요일 점심을 먹고 남편이 갑자기 시키지도 않은 밀린 설거지를 열심히 한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애들 목욕을 시키거나 한다는 것은 “나 나가서 조금만 놀다 와도 돼?”라는 뜻이었다.
남편이 친구들 만나서 하는 일은 고작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며 피시방에서 서너 시간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는 것이 전부지만, 그때의 나는 피시방은커녕 집 앞 슈퍼마켓에 나가는 것조차 힘들 때였다. 지금은 많이 사그라졌지만 그때 남편의 철없는 태도가 아직 상처로 남았다. 그래서 더욱 ‘육아를 도와줄게’라는 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심각해진 나의 산후우울감으로(감히 '우울증'이라는 말은 못 붙이겠다) 회사를 쉬고 3개월 정도 함께 육아에 매달린 남편은 그 뒤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남편의 휴직이 끝난 3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불안정하고 경력이 애매한 프리랜서이긴 하지만, 또 아기들이 어린이집에 가 있는 사이 압축적으로 모든 일을 끝내놔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다시 일할 수 있어서 기뻤다.
무엇보다 요즘은 일일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남편 덕에 '육퇴(육아퇴근)'도 조금 빨라졌다. “시키기 전에 좀 해. 왜 시켜야만 해? 시키기 전에 하면 안 돼? 시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 줄 알아?”라고 하면 “나는 공대생이라 명령어를 넣어줘야 할 수 있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던 남자가 이제 조금씩 철이 드는 모양이다.
◇ 시뮬레이션 육아에서 실전육아 해본 남편, “도와줄게”에서 “내가 할게”로
요즘 우리 생활은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먼저 일어나 우리를 깨우며 노는) 아기들에게 배도라지 즙을 한 팩씩 쥐여준 뒤 아침을 준비해 먹인다. 그 사이 남편은 씻고 두유나 빵을 한 쪽 먹고 출근한다. 폭풍 같은 어린이집 등원을 마친 나는 집에 돌아와 애들이 어지른 집과 주방을 치우고 노트북을 켜 업무를 본다.
오후 5시 즈음 역시나 폭풍 하원을 마친 나는 애들을 한놈씩 잡아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킨 뒤 장난감이 잔뜩 든 상자를 내려준다. 애들이 신나게 장난감을 던지고, 빼앗으며 노는 사이 나는 애들과 어른의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애들 저녁을 먹이고 있으면 남편이 퇴근해 어질러진 집부터 치우고 저녁을 함께 먹는다.
내가 주방 정리를 하는 사이 남편은 애들과 잠시 놀다가 기저귀를 갈고 잠옷을 입혀 재운다. 애들이 잠에 들면 남편도 같이 잠드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애들이 깨어 있을 땐 하기 힘든 물걸레 청소를 한다. 그사이 나는 샤워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한다.
모든 집안일이 끝나면 우리는 TV를 틀고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며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며칠 전에는 요즘 몸이 자꾸 붓고 너무 뻐근해 “일주일 정도 마사지만 받다 오고 싶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용케 그 말을 들은 남편이 “과감하게 다녀와”라고 했다.
“그럼 애들은 어떻게 하게.”
“세상에 못 할 일은 없어. 하면 다 하게 돼 있어. 내가 할 테니까 다녀와.”
“오빠가 애들 세 끼 밥 다 챙겨주고, 집안일 다 하고, 같이 놀아주면서 심지어 오빠 밥도 잘 챙겨 먹을 수 있다고?”
“내 밥은 애들 밥 먹이면서 같이 먹을 거고, 애들은 자기들끼리도 잘 노니까 걱정 없고 집안일도 문제없으니까 다녀와.”
일주일은커녕 하루도 못 버틸걸. 그래도, ‘도와줄게’가 아니라 ‘내가 할게’로 바뀌어서 기특하긴 하다.
요즘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시키지 않아도 각자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한다. 내가 일이 있거나, 병원에 가야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야 할 때 남편은 휴가를 내거나 출·퇴근 시간을 조절해 나의 스케줄에 맞춰 아이와 집 안을 돌본다(물론 서로 미리 일정을 조율해야 가능한 일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남편에게 개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남편이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나가서 조금 놀다 와”라고 먼저 제안한다.
막막하고, 힘들기만 하고, 자주 우울했던 육아와 가사가 조금 즐거워진 데에는 ‘프로그래밍’된 남편의 덕이 크다.
*칼럼니스트 전아름은 서울 용산에서 남편과 함께 쌍둥이 형제를 키우고 있는 전업주부다. 출산 전 이런저런 잡지를 만드는 일을 했지만 요즘은 애로 시작해 애로 끝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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