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었다고 폭력이 '장난'이 되는 건 아니다
웃었다고 폭력이 '장난'이 되는 건 아니다
  • 칼럼니스트 엄미야
  • 승인 2019.12.1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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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미야의 일하는 엄마의 눈으로] EBS '보니하니' 사건을 통해 본 성인지감수성

“친해서 일어난 장난이었다.”

EBS 교육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청소년 출연자에 대한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남성 출연자가 여성 청소년 출연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이 문제가 되어 남성 출연자는 출연 정지를 당했다. 그럼에도 여론이 잦아들지 않자 EBS는 결국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을 잠정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EBS 측이 보인 태도다. 그 일이 발생한 직후 EBS는 입장문을 냈는데, 그 내용의 요지는 “출연자들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다 보니 장난을 심하게 친 것”이고, “출연자 간의 폭행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남성 출연자가 주먹을 휘두른 직후, 여성 출연자가 어깨를 움켜쥐고는 있었지만, 웃고 있는 표정이 EBS의 그 ‘장난’이라는 말을 비호했다. 정작 당사자는 장난으로 받아들였는데, ‘프로불편러’들이 괜한 문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당사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니, 둘의 관계가 친했으니, 직접적인 신체적 접촉이 없었으니(없었다고 볼 수도 없겠지만,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폭력이 아니라는 논리. 많이 들어온, 참 익숙한 얘기들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생각난 몇 가지 기억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친해서 한다는 농담, 장난이 결과적으로 피해자의 몸과 마음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일들이었다.

EBS는 '보니하니' 공식 홈페이지에 김명중 사장 명의의 사과문을 게시했다. ⓒEBS '보니하니' 홈페이지 메인 화면 갈무리
EBS는 '보니하니' 공식 홈페이지에 김명중 사장 명의의 사과문을 게시했다. ⓒEBS '보니하니' 홈페이지 메인 화면 갈무리

◇ "할 말이 '성희롱'밖에 없으면 아예 대화를 마세요"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이었다.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선배들이 모여앉은 자리에서 나의 연애 이야기가 화젯거리로 떠올랐는데,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가 한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노조에서 ○○가(남편) 미야(나)를 ‘자빠뜨렸다’고 말한다며?”라고 말했고, 거기 앉은 사람들은 “와하하” 하고 웃었다. 나도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다음 날 나는 겨우, 그 선배보다 연장자였던 여자 선배를 통해 내가 얼마나 모욕적이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그 남자 선배에게 알렸고, 사과를 원한다는 내 생각을 전달했다.

그때도 그 말을 들었다.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상처받을 줄 몰랐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웃었다. 장난이라는 그 선배의 말보다 그 앞에서 웃었던 내가 죽도록 싫었던 기억.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노동조합에 성평등 교육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교육 시간 내내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조합원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그런 게 다 성희롱이면, 여성들이랑 어떻게 말을 섞나요? 다 친해서 하는 농담인데. 그리고 우리 여성 조합원들은 그런 농담 더 좋아합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친한 표현이 그런 대화밖에 없다면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어쨌든 그것은 범죄니까요.”

◇ 맞은 사람이 웃었대도 폭력은 폭력이다 

나도 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무수한 송년회 술자리에서 친함을 빙자한 성적인 농담들이 오가고, 농담을 빙자한 야릇한 건배사들이 오가지만, ‘화기애애’한 자리를 위한 거라며 조금이라도 불편한 내색을 하는 사람들을 사회생활 못 하는 ‘프로불편러’로 취급한다는 것을.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은 (또는 남성은) 그런 폭력적 언행이 불편하지만, 그 앞에서는 웃으며 ‘대범’한 척하고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못난 나만 탓한다.

대놓고 접촉하지 않았다고,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그 자리에서 거부하고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도 폭력은 폭력이다. 시선폭력, 언어폭력도 모두 폭력이다. 맞은 사람이 웃었다고 폭언과 폭행이 장난과 농담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미투운동’의 학습효과로 폭력에 대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꽤 높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공영방송이라는 곳에서의 대응 수준이 저렇다니. 아직 갈 길이 멀다.

백 번, 천 번은 했던 말인데도 아직 부족했나 보다. 다시 꾹꾹 눌러 말해본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다. 

그런 장난, 지겹다. 이제 멈추자.

*칼럼니스트 엄미야는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두 딸의 엄마다. 노동조합 활동가이자, 노동자 남편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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