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떨쳐지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다. 동네 작은 놀이터와 그곳에서 고군분투했던 나와 아이의 모습이다.
아이가 태어나 7년을 산 동네 놀이터에 아이와 나는 거의 매일 갔다. 조그만 동네의 작은 놀이터라서 동네의 아이들은 모두 모였다. 같이 놀고, 간식도 같이 나눠 먹고, 엄마들은 벤치에 앉아 수다도 떨고. 흔한 동네 놀이터 풍경이었다.
나는 다른 엄마들처럼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 수 없었다. 모든 운동 발달도 느렸던 아이는 좋아하는 그네를 혼자 타지 못해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내 무릎에 앉혀 그네를 태워줬다.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가기 힘들어하는 아이의 엉덩이를 뒤에서 톡톡 밀어주고, 아이를 앉고 미끄럼틀을 탔다.
그렇게 아이를 더 많이 움직이게 하고, 더 많이 웃게 하려고 한참을 놀이터에서 놀다오면 온 몸이 고단해서 아이와 함께 낮잠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그 때 내 소원은 ‘나도 다른 엄마들처럼 놀이터에서 편하게 수다 좀 떨어봤으면’이었다.
아주 천천히 자라던 아이는 대여섯 살이 되자 혼자서 그네도 신나게 타고, 미끄럼틀도 쓱 내려오고, 또래 친구들이 하는 술래잡기 시늉도 할 수 있는 아이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엄마들 틈에서 수다를 떨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나와 아이를 터부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 친절했지만 분명히 다른 견고한 벽이 있었다. 아이가 커갈수록 그들이 얘기하는 유아학습지나 영어유치원 같은 주제에 끼어들 수가 없었고, 우리 아이의 치료실 이야기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7년을 거의 매일 갔던 그 동네 놀이터에서 우리는 ‘섬’이었다. 발달장애 가족이라는 외로운 섬.
◇ 섬을 잇다
그 섬들이 연결되면 어떻게 될까? 섬과 섬 사이에 다리가 생기고, 또 다른 섬이 사이를 메워준다면?
제주로 이주해서 우리 가족에게 좋은 변화들이 많이 생겼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신기했던 일은 ‘외로운 섬’들이 연결되는 경험이었다. 이미 단단한 큰 땅에 우리 가족이 흘러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우연히 알게 된 제주도 발달장애가족 커뮤니티는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다양한 활동을 하며 즐거운 일상을 이어간다. 학교에 가는 날보다 이런 저런 프로그램으로 주말이 더 바쁘다. 여러 가족이 함께 오름을 오르고, 난타를 친다. 수영동호회 친구들과 함께 수영도 배운다. 일년에 몇 번씩은 체육대회와 가족캠프, 송년회 등 특별한 이벤트에도 초대된다.
이 모든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이다. 이 안에서 더 이상 우리 가족은 이방인이 아니다. 모두 똑같은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다 보니 부모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 우리 가족이 사는 모습이 남들과 다르지 않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 가득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신기하게도 발달장애가족이라는 섬들이 모이니, 일상의 행복이라는 것이 스며들었다. 드디어 우리 가족도 섬에서 나와 땅에 발을 내린 것 같았다.
이 일들은 가능하게 한 것은 정부도, 복지기관도 아닌 온전히 부모들의 힘이었다. 장애아이의 부모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고, 우리 아이들이 즐겁게 행복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요구하고 싸운 결과였다. 그리고 달콤한 열매는 발달장애가족 공동체가 함께 나누었다.
◇ 우리의 도채비 놀이터
귀한 열매를 받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지난해 선배부모와 나를 비롯한 어린아이를 둔 부모가 합심해서 발달장애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었다. 바로 ‘꿈다락토요문화학교- 도채비 놀이터’이다.
꿈다락토요문화학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는 주말 문화프로그램이다. 보통 지역의 문화예술단체가 지원금을 받아 학생과 부모들에게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100% 정부 지원사업이라 공모 경쟁도 치열하다. 우리는 문화예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과감하게 그 문을 두드렸다. 발달장애가족도 주말에는 문화생활도 즐기고, 가족끼리 나들이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게 지역의 문화예술교육이 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다행히도 우리 프로그램 취지가 공감이 되었던지 공모에 선정되었다.
우리는 매주 일요일마다 도채비 놀이터가 열리는 돌하르방미술관에서 맨발로 숲길을 걷고, 숲 놀이와 미술놀이를 하며 주말 하루를 보낸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약 40가족, 130명에 가까운 발달장애가족이 이 도채비 놀이터에서 함께 했다.
운영진은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사실 참가자들이 가장 이 프로그램에서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만의 시간과 공간’이다. 아이들은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미술관 숲에서 논다. 부모들은 더 이상 불안하고 초조하게 아이들을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어 좋다.
10회에 걸쳐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참여가족들의 얼굴도 조금씩 변해간다. 아이들이 제일 먼저 무장해제가 되어, 숲 놀이터로 달려온다. 말수가 없던 부모님들도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낸다. 굳은 표정으로 뒷짐만 지고 있던 아빠들이 개구쟁이 소년이 되어 더 재밌게 논다.
봄과 가을, 2기에 걸쳐 도채비 놀이를 진행하다보면 사실 운영진은 너무 바쁘고, 힘도 든다. 우리도 발달장애아이를 둔 부모이다 보니, 아이를 챙기면서 여러 참가자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아온 발달장애가족이 웃는 모습을 보면 참 좋다. 내가 처음 제주도에 와서 경험한 ‘외로운 섬이 연결되는 경험을 이 가족들도 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벅차기도 한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을 해본 경험도 없는 부모들이지만, 발달장애가족도 평범하게 행복하게 일상을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모이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
곧 올해 도채비 놀이 2기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모인 가족들과는 또 어떤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될지 벌써 기대된다!
*칼럼니스트 김덕화는 제주에서 열 살 발달장애 남자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2년 전 제주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어서 덜컥 제주도로 가족이 이주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주원이를 더 잘 이해하고, 세상에 주원이를 더 잘 이해시키고 싶어서 관심을 가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책읽기선생님, 장애이해교육강사, 발달장애이해 그림책 「우리 아이를 소개합니다」 공동저자가 돼 있네요. 다양한 매체에서 잡지를 만든 경험이 있고, 지금까지 아이를 키우며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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