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삼시세끼 설거지에서 해방입니다
주말, 삼시세끼 설거지에서 해방입니다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15.11.12 1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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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 유리 그림 <대추 한 알>

[연재]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아홉살 딸이 설거지를 해보고 싶단다. 재밌을 것 같다면서. 설거지 하는  내 모습이 그렇게 즐거워 보였나? 그럴리가. 삼시세끼 밥 차리고 치워야 하는 주말이면 설거지 하기 싫은 티 팍팍 내며 할 때도 많았는데... 아이들이 설거지를 하고 싶어 해도 불안해서 못 맡기겠다는 엄마들도 있다지만, 내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리.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 나야 좋지."

 

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치마를 목에 걸어주었다. 곧 맨손으로 차분하게 '초벌' 설거지를 시작하는 딸. 밥그릇에 묻은 밥알들을 걷어내고, 접시에 묻은 남은 반찬들도 깨끗하게 처리하는 딸의 야문 손. 수세미에 음식물이 밸 때마다 아차차 했던 순간이 많았던 나로서는 꽤 놀라운 일이었다. '저건 어디에서 보고 저렇게 하는 거지?'

 

"왜 그렇게 해?"

"응... 이게 깨끗할 것 같아서."

"두 번 해야 하는데 귀찮지 않아?"

"아니."

 

이어 보란 듯이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본설거지에 들어간 딸. 알려준 적도 없고 처음 하는 데도 크게 실수가 없다. 뒷정리는 또 어떻고. 접시는 접시끼리, 밥그릇은 밥그릇끼리, 컵은 컵끼리 차곡차곡 쌓아두는 모습이라니. 설거지 후 그릇들을 건조대에 산처럼 엎어놓은 나와는 좀 다른 모습. 풋, 생각해보니 이건 제 아빠를 닮았네 싶어 웃음도 났다.

 

한번은 바느질 하는 걸 알려달라고 해서 가르쳐 주었더니, 이젠 박음질 솜씨도 제법이다. 나는 중학교에 가서야 겨우 했던 그런 것들을 이제 아홉살 된 딸이 하겠다니...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한동안 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래보다 걸음도 늦고 말도 늦어 애를 끓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그러다 생각난 시 한 소절.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그 시를 온전히 담은 그림책이 나왔다.

 

설거지 하겠다는 딸, 언제 이렇게 컸을까

 

대추 한 알. ⓒ이야기꽃
대추 한 알. ⓒ이야기꽃

<대추 한 알>은 장석주 시인이 2005년 낸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에 수록된 시 '대추 한 알'에 그림책 작가 유리가 그림을 보태 낸 그림책이다. 몇 년 전, 광화문 한복판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큰 걸개에 쓰인 이 시를 본 기억이 있다(찾아보니 2009년 광화문 교보빌딩에 '광화문 글판'으로 걸린 적 있는 시란다).

 

고작 대추 한 알인데... 그 안에서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낱을 찾아내는 시인이라니. 시인이 괜히 시인이 아니구나 싶어 고개를 주억거렸던 시. 유리의 사실적인 그림 또한 그 감동을 더하기에 충분한 수준급이다. 

 

한여름 벌들이 열심히 꽃가루를 실어 나른 덕에 대추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초록의 열매는 뜨거운 태양과 소낙비를 맞으며 점차 영글어 갑니다. 날이 궂다고 농사꾼들이 농사를 놓지 않듯, 한번 맺은 열매도 태풍과 벼락을 이기며 붉게붉게 익어 갑니다. 그렇게 뜨거운 가을 볕들까지 받아낸 열매, 대추가 손에 쥐어진 날 시인은 말합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고,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고.

 

설거지를 끝낸 딸에게 '엄지척' 폭풍 칭찬을 해주었더니 '뭘 이 정도 가지고'라는 반응. 그러나 9년 만에 찾아온 황금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나는 여세를 몰아 "딸~ 앞으로 주말 설거지 좀 부탁해" 하고 쐐기를 박는다. 싫지 않은 딸의 표정. 그러더니 며칠 후.

 

"엄마, 나 또 설거지 할래."

"응? 어쩐 일로?"

"일기 써야 하는데... 쓸 게 없어서, 설거지나 하고 시로 쓰려고. 시쓰기는 쉬울 것 같아서."

 

아래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딸의 시 '설거지' 되시겠다.

 

설거지를 하자 물이 줄줄줄 쏴쏴

거품을 접시에 칠하자 쓱쓱 보글보글 보글보글 쓱쓱

거품을 헹구자 접시를 쓱쓱쓱 뽀득뽀득

 

자 이제 접시와 컵을 건조대에 차곡차곡

이제 끝.

 

딸의 말마따나 행과 연의 형태는 갖췄으니, 시는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 그래, 시인도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겠지. 아무렴.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로, 9살 다은, 5살 다윤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두 딸과 함께 읽으며 울고 웃은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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