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한국에 갈 계획이 없었다. 이제 제법 의젓한 큰아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나, 아직 두 돌도 안된 둘째와 함께 장거리 비행을 하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네 식구가 된 뒤로 비행기 한 번 탈 때마다 훅훅 줄어드는 통장 잔고도 걱정이었고, 다녀오면 뒤죽박죽되기 일쑤인 스케줄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여름이 시작될 무렵 친정어머니가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분간 한국에 갈 계획이 없었다'는 나의 계획은 즉각 바뀌었다. 나는 두 아이와 한국행 비행기에 급히 몸을 실었다. 남편은 미국에 남기로 했다. 미국 집 이사를 앞둔 시점이었고, 남편이 새로 임용된 직장에서 남편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여나 먼 곳에서 사는 딸이 가슴앓이할까 봐 그간 엄마는 편찮으신 티 한번 내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 또 한 번 깨달았다. 엄마가 나에게 정말 큰 울타리였음을. 항상 같이 있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내게 힘을 주는 존재였음을. 나는 여전히 늘 엄마에게 걱정만 끼치는 응석받이 아이였음을.
큰아이는 꽤 오랜 시간 외할머니 손에 컸다. 그래서 외할머니 사랑이 각별하다. 큰아이에게는 할머니가 조금 불편하신 것으로 하고, 병명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이가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고 싶었던 외할머니의 배려였다.
도착해서 엄마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는 원래도 살짝 마른 편이었는데, 이제는 뼈만 앙상하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그 모습에 눈물이 왈칵 나올 것만 같았지만 아이들 앞이라 겨우 참았다.
아이 눈에도 외할머니가 너무 약해 보였던 모양이다. 큰아이는 “함미(큰아이가 부르는 외할머니의 애칭), 함미 밥 잘 드셔? 왜 이렇게 조그마해졌어?”하고 할머니 손을 잡았다.
외할머니는 괜찮다고 웃으며 손주를 꽉 안아주셨다.
아이 둘과 함께 엄마의 집에 머물며 동생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엄마 곁에서 극진히 식사를 챙기고 병원에 모시고 다녔다. 문득 도대체 나는 이국에서 뭘 하고 있었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내 가족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왜 나는 그 먼 곳에 머물고 있을까 하는 회의감도 몰려왔다.
아이 둘과 편찮으신 어머니, 그리고 애써도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과 함께 6월과 7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름은 거의 다 지나 있었고 다행히 엄마의 수술도 잘 끝났다. 아직 항암이라는 긴 여정이 남아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발길은 떨어지지 않고 마음은 복잡했다.
나와 손주들을 보내는 엄마의 마음은 더 힘들 것이란 생각에 눈물만 자꾸 났다. 자식을 떼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제는 잘 알기에, 멀리 떠나는 그 여정으로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둘째는 천진난만하게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내 품에 안겨 간식을 먹었다. 큰아이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며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 나뿐만이 아니라 손주들도 할머니에게는 영원한 아기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기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그 누군가의 아기다. 아기를 키우면서도 자꾸 그 사실을 잊는다. 엄마도 우리가 참 보고 싶을 텐데…. 엄마가 유난히 더 보고 싶은 미국의 여름밤. 엄마가 건강하시길. 그저 건강하시길. 마음속 깊이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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