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배우는 시간… 아이와 나의 '추억'이 만난다
피아노를 배우는 시간… 아이와 나의 '추억'이 만난다
  • 칼럼니스트 김보민
  • 승인 2020.12.0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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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기] 피아노 학원 가는 길
아이 생일 선물을 고민하다 피아노 수업을 떠올렸다 ⓒ베이비뉴스
아이 생일 선물을 고민하다 피아노 수업을 떠올렸다 ⓒ베이비뉴스

지난 9월, 만 6세가 되는 어린이의 생일을 맞이해 어떤 선물을 줄까 고민하다 피아노 수업을 떠올렸다. 아이는 흔쾌히 좋다고 했고 옆 동네에 있는 피아노 학원을 들러 상담을 받기로 했다. 나와 남편, 아이 둘은 모두 나들이 가듯 들뜬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 들어가니 커다란 홀이 우리를 먼저 맞이했고, 그곳에는 커다란 피아노 두 대가 등을 맞대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아이들은 자석에 끌려가듯 피아노로 향했고, 하얗고 까만 건반 위에서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여 피아노를 흔들어 깨웠다. 오랜만에 듣는 피아노 소리였다. 잠깐 잊었던 나의 이름 모를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도 들었다.

아이는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30분 수업을 듣기로 했다. 담당자가 등록비와 수업료를 결제하는 동안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왔다가 집에 오는 일정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갑자기 남편이 말했다.

“당신도 피아노 레슨 받지 그래? 어차피 수요일마다 아이 수업 때문에 누구든 여기 같이 와서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데 그 시간에 피아노 칠 수 있잖아?”

“지금은 재택근무 하니까 일 마치고 데리고 올 수 있지, 재택근무 끝나면 어떻게 해?”

“재택근무 끝나도 수요일 하루 조금 일찍 퇴근해서 오면 되지. 같이 피아노 레슨 받아봐.”

“그래볼까? 나 피아노 좋아해. 어릴 때 피아노 치는 거 좋아했어. 그럼 나도 피아노 칠래, 좋아!”

◇ 아이와 함께 피아노 학원 다니는 엄마가 됐다

이리하여 나와 아이는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니며 피아노를 배우는 ‘동학’이 되었다. 매주 수요일 오후는 바쁘면서 들뜨는 시간들이다. 아이가 학교에 다녀와 간식을 먹으며 숙제를 하는 동안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피아노 학원에 갈 준비를 한다. 피아노 학원 가방으로 우리끼리 정한 캔버스백 두 개에 각자 피아노 교본을 넣고, 물통과 교통 카드를 잊지 않았나 살펴보고 길을 나선다.

우리 둘이 나가는 모습을 둘째에게 들키지 않으려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대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지구가 떠나가라 우는 둘째 소리에 미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가야 하므로 수요일은 언제나 바람처럼 집을 빠져나가야 한다.

각자 본인의 한쪽 어깨를 피아노 가방에 내어 주고 길을 나선다.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버스 정류장을 향하면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이야기들이 능선처럼 이어진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스크 한 장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우리와 마주하며 걸어오던 아기가 철퍼덕 엎어지는 순간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세발자전거 뒤에 아이 둘을 싣고 힘차게 패달을 밟는 여성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하늘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까지 매일 같은 길을 걸어 정류장을 향하지만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매일 다르게 시작되고 생각하지 않은 결론에 다다른다. 

피아노 악보를 보고 있으면 내가 피아노의 언어로 피아노와 대화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도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보민
피아노 악보를 보고 있으면 내가 피아노의 언어로 피아노와 대화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도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보민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아이는 마스크를 잠깐 내리고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정류장 벤치 뒤 난간 위를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우리가 타야 하는 버스가 온다. 버스에 오르고 기사 아저씨에게 "헬로(Hello)" 인사를 하고 빈자리를 찾아 나란히 앉는다.

버스를 타고 갈 때에는 둘 다 별 말이 없다. 아이는 버스 안을 채운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정신 없고, 나는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동네를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네 정거장 후에 내려야 하기에 이야기를 나누는 건 쉽지 않다. 몇 번 정거장을 착각하고 잘못 내린 이후 제대로 버스를 하차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숙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버스를 내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 피아노 학원이 있는 작은 동네 쇼핑몰에 들어간다. 1층에 있는 편의점을 들러 아이는 포도 맛 주스를 하나 고르고, 나는 우롱차나 녹차 음료를 고른다. 설탕이 덜 들어갔다고 광고하며 진한 보라색이 아닌 연보라색으로 디자인된 포도 맛 주스를 아이에게 주면서, 설탕을 많이 먹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같이 건넨다. 아이는 이제 설탕이 덜 들어간 포도 주스를 혼자 고를 줄 알게 되었다.

계산을 하고 편의점을 빠져나오자마자 아이는 포도 맛 주스 한 모금을 마시고 만족한다는 표정을 눈가에 내비친다. 이제 피아노를 칠 준비가 거의 다 된 셈이다. 

피아노 학원에 들어가 열 체크를 하고 한쪽 어깨에는 캔버스 가방, 한쪽 손에는 설탕이 적게 들어갔거나 설탕이 아예 안 들어간 음료수를 들고 각자 피아노 방으로 들어가며 인사를 나눈다. 

“좋은 시간 보내!”

◇ 나도 아이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안겨주고 싶다

나는 국민학교 2학년 때 동네 상가 2층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처음 만났다. 피아노 학원 맞은편에는 세탁소가 있었는데, 2층 오르는 계단에서부터 세탁소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난 뭔가 화학적이지만 톡 쏘는 느낌은 없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학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그리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즐겼다. 

그때 나에게 피아노 수업은 엄마가 선물처럼 안겨준 시간이었다.

동생과 손을 잡고 동네 놀이터를 가로질러 가는 길을 걸으며 그때가 아니면 나누지 못할 우리만의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작곡가들이 남기고 간 악보를 눈으로 짚어가며 작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나와 피아노가 만든 소리를 귀로 듣던 시간들, 키가 아주 컸던 피아노 선생님이 피아노 악보 위에 작은 꽃 그림을 그려주면 곡 한 번 연습하고 꽃송이 하나 색칠하며 피아노로 채운 시간들, 또 다시 동생과 나란히 학원 문을 박차고 나와 집으로 향하며 놀이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결국 까마귀만큼 얼굴이 까매져 서야 집에 향하던 시간들. 

아무도 나에게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거나, 대회에 꼭 나가야 한다거나, 더 잘 쳐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서 집 문을 나서서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피아노를 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 짧은 여정을 만끽했다.

어떤 날은 놀이터에 빨리 가서 놀고 싶어서 선생님이 그려준 꽃 잎 다섯 개 중 한두 개는 마음속으로만 연습하고 색칠을 했다. 또 어떤 날은 선생님의 결혼식 피아노 반주를 부탁받아 즐거운 마음에 한 시간 전에 피아노 학원에 가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피아노 학원 원장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악보들 구경하는 게 재미있어 한참 피아노 학원에 머무르며 악보를 넘겨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피아노를 열심히 친 결과, 나는 피아니스트가 되지도 않았고,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지도 않았고, 피아노를 열심히 친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피아노 건반을 만진 적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피아노를 치러 가며 가졌던 즐거운 기억을 한아름 안고 아이와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엄마가 되었다.

수업이 끝난 아이가 피아노 교실을 빠져나온다.

“재밌었어?”

“응.”

“엄마도 진짜 재밌었어. 버스 타면 오늘 배운 거 이야기해줄게. 이제 집에 가자.”

피아노를 치고 나서 집에 가는 길은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김보민
피아노를 치고 나서 집에 가는 길은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김보민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면 꼭 2층으로 오른다. 버스 맨 앞 좌석에 앉아 여행하는 마음 안고 집으로 향한다. 저 멀리 뭉게구름과 지는 해가 만나 불그스름해지는 하늘을 보며 우리는 각자 피아노를 치며 느낀 점들을 조금 털어놓다가 저 멀리 하늘로 시선을 보내고 이내 아주 짧은 생각에 잠긴다.

피아노 책이 든 캔버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버스를 타고 피아노를 치러 떠나는 이 여정을 언제까지 아이와 함께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까지 기쁜 마음으로 피아노 학원을 다닐 거다. 내 어릴 적 기억하고 싶은 시간으로 자리 잡은 피아노처럼 아이에게도 지금 이 시간이 꿈처럼 기억될 수 있도록 말이다.

*칼럼니스트 김보민은 '한국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라는 호기심으로 2년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다. 싱가포르에 올 때 4살이던 첫째와 생후 2개월이던 둘째는 어느덧 각각 6살, 26개월로 훌쩍 자랐다. 365일 여름이고,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로 영어를 쓰고, 작은 나라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아시아를 가르쳐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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