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과 경험 사이, 소풍 식단이 사라진 자리
[공동육아의 시선] 20.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의 신체적 안전만 측정 가능한 영역으로 두고, 경험에서 얻는 성장의 가치는 충분히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고=최진이[email protected]수정 2026.10.29 23:03
공동육아의 정신은 '내 아이'를 맡기거나 '남의 아이'를 보호해주는 것을 넘어서 우리 아이들을 함께 키우자는 데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동육아를 실천하고 있는 원장, 교사, 학부모가 직접 최근 보육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공동육아의 시선'이라는 기획을 진행합니다. 이 기획은 사단법인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과 함께합니다. -편집자 주
가을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하늘은 맑고 미세먼지마저 없는 요즘은 아이들과 소풍 다니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어디 멀리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공원과 숲길을 걸으며 자연을 만나고, 친구들과 함께 돗자리를 펴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하루가 된다.
아이들과 가을 소풍을 준비하며 설레던 어느 날, 한 통의 공문이 내려왔다.
◇ 어린이집 조리실에서 만든 음식 외부 반출 금지라는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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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위생법」 제88조 및 식품의약품안전처 「집단급식소 급식안전관리기준」에 따라, 집단급식소로 신고된 기관은 관할 지자체에 신고된 장소 내에서만 조리 및 배식·취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조리된 음식을 외부로 이동·운반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식중독 사고를 예방하고 급식 위생 및 안전 관리를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따라 견학, 소풍 등 부득이한 사유로 외부에서 식사를 제공해야 하는 경우, 아래의 대처 방안 및 식단 작성 수칙을 준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 외부 음식 제공 시 대처 방안 1) 원내 조리실에서 만든 음식의 외부 반출은 불가합니다. 2) 외부 활동 시, ① 각 가정에서 조리한 도시락을 지참하도록 안내하거나, ② 학부모 동의 절차를 거쳐 안전성이 확보된 외부 음식(도시락, 식당 이용 등)을 제공하여야 합니다. |
식품위생법과 집단급식소 급식안전관리기준에 따라 집단급식소에서 조리한 음식은 신고된 장소 안에서만 제공해야 하며, 외부로 반출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견학이나 소풍 등으로 어린이집 밖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가정에서 도시락을 준비하거나, 외부에서 조리된 도시락 또는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우리는 소풍 식단을 편성해 어린이집에서 직접 조리한 볶음밥을 가지고 나갈 계획이었다. 아이들은 평소와 같은 음식이라도 밖에서 친구들과 함께 먹으면 색다른 경험으로 즐거워한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소풍 식단을 운영하며 어린이집 주변이나 나들이 장소에서 즐거운 식사 경험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이 불가능해졌다.
공문은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각 가정에서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아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가정에서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을 먹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또한 어린이집 친구들과 식당을 이용하거나 외부 도시락을 사서 먹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색다른 추억이 될 수 있다.
◇ 안전성 확보된 업체 음식 이용하라?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고민이 생긴다.
가정마다의 상황이 다르다. 어쩌다 한 번 준비하는 도시락이 부담 없는 가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도 있다. 모든 가정이 기꺼이 참여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어떤 가정에서는 준비의 어려움을 겪고, 다른 가정에서는 준비하지 못해 미안함이나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건 결국 아이들이다.
외부 음식을 제공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안전성이 확보된 업체를 이용하라고 하지만 실제 조리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안전성 확보란 늘 추구하는 가치지만 변화 요인이 늘 있어서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하지 않은 곳에서 조리된 음식의 안전성이란 막연한 믿음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풍을 가지 않거나, 소풍을 가더라도 점심은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와 먹는 방법이다.
위생과 안전만을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 가장 안전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잃게 되는 경험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최근 몇 년 사이 어린이집 급식에서는 비슷한 변화들이 이어지고 있다.
작년부터는 질식 사고 예방을 위해 급식에서 떡 제공이 사실상 제한되었다. 안전을 위한 조치라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된다. 다만 보호자 안내와 협의 절차를 거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
◇ 어린이집 소풍, 점심 식사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소풍 식단 역시 비슷한 대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이들의 안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안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성장에는 안전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성장 과정은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직접 경험하면서 배우고 성장한다.
떡을 씹어보는 경험, 옥수수를 베어 먹는 경험, 친구들과 함께 돗자리 위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는 경험, 도시락 뚜껑을 열며 설레는 경험, 자연 속에서 충분히 뛰어놀고 배고픔을 느낀 뒤 먹는 한 끼의 즐거움. 이러한 경험은 모두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영유아기의 배움은 설명보다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함께 식사하는 순간은 단순한 점심시간이 아니라 사회성을 배우고, 관계를 형성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교육의 과정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의 신체적 안전만 측정 가능한 영역으로 두고, 경험에서 얻는 성장의 가치는 충분히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정책을 만드는 입장도 이해한다.
식중독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는 매우 크고, 행정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관리 가능한 영역 안에서 안전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다만 어린이집 정책은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만의 시선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집 현장에는 아이들과 매일 생활하는 교사들이 있고,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있으며, 어린이집 운영을 책임지는 원장들이 있다. 아이들이 어떤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현장에 있는 이들이다.
따라서 어린이집과 관련된 정책을 마련할 때는 행정기관과 전문가뿐 아니라 교사, 원장, 학부모 등 현장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논의 구조가 필요하다. 현장이 가진 경험과 정책이 만날 때 비로소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실제로 공동육아에서는 CCTV 설치 의무화 과정에서 모든 보호자가 동의할 경우 예외를 인정하는 규정을 마련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방식처럼 소풍식단과 관련해서도 운영위원회나 보호자 협의를 통해 일정한 조건 아래 예외를 허용하는 제도가 검토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아이들의 안전 지키면서 아이들의 경험 지키는 방법 찾아야
어린이집 급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가 아니다. 급식은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을 지원하는 중요한 교육 과정이며, 식사 경험 자체가 교육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급식만이 아니다. 즐거운 식사 경험도 필요하다. 건강한 몸을 만드는 영양도 필요하지만,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먹는 추억도 필요하다.
우리는 아이들이 더 많이 뛰어놀고, 더 많이 자연을 만나고, 더 많이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결국 아이들을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시키는 힘이라고 믿는다.
정책 역시 안전과 경험을 대립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두 가치를 함께 지켜낼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아이들의 성장은 '위험이 없는 상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충분한 경험 속에서 세상을 만나고 배우는 과정이 함께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면서도 아이들의 경험을 지켜줄 수 있는 방법. 어린이집 정책이 앞으로는 그 균형을 더 깊이 고민하며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정책위 최진이 씨가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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