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하면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등짝 스매싱'을 날리며 조금이라도 더 때를 밀려는 엄마와, 1초라도 빨리 엄마 손에서 벗어나고 싶은 딸. 결혼 전까진 그랬는데 결혼하고 나니 목욕탕에 혼자 가는 맛이 아주 좋았다. 엄마처럼 때를 밀 이유가 없었다. 대충대충 슬렁슬렁하는 목욕. 식혜 혹은 바나나 우유 하나 정도는 꼭 먹어줘야 하는 목욕탕의 참맛을 알게 된 거다. 물론 아이를 낳기 전까지 그랬다는 말이다. 딸 둘을 둔 친구가 억울하다며 한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딸 둘은 나만 손해야. 남편은 워터파크나 목욕탕에 가도 혼자 제 몸만 씻으면 되는데, 나는 이제 목욕탕에서도 저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 한다고. 어떨 때는 나는 정말 물만 묻히고 나온다니까."
이 말은 자매를 둔 나에게도 현실이 되었다. 아이를 낳은 뒤로 목욕탕은 더이상 바나나우유를 홀짝거리며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낭만적인 장소가 되지 못했다. 물기 많은 바닥에 미끄러질까 봐 걱정, 탕 속에 빠질까 봐 걱정, 혹시라도 다칠까 봐 두 아이를 내내 감시해야 했으니까. 감시만 하나? 노노.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기고 머리도 감겨야 한다. 애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녹초가 된 나는 친구 말대로 오랜만에 탕 속에 몸을 담근 것만으로도 좋았다고 위로할 뿐이다.
그런데 이 생각은 못 했다. ‘엄마 없는 아이는 어떻게 목욕탕을 가야 할까?’ 하는. 이 질문에서 시작된 그림책이 있었으니 바로 「문어목욕탕」(최민지 글·그림, 노란상상, 2018년)이다.
동네에 새로 생긴 문어목욕탕. 짝꿍 민지는 벌써 엄마와 가봤다고 하는데 엄마 없는 나는 아직 못 가 봤다. 이젠 너무 커버린 나는 아빠와 남탕에 갈 수 없고, 이미 나보다 훨씬 빨리 커버린 아빠도 나와 여탕에 갈 수 없다. 혼자 가 볼까? 망설일 이유가 없다. 오픈 이벤트로 어른은 8000원, 아이는 800원인데 '엄마 없이 혼자 온 아이'에게는 고작 80원만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픈 전단을 가져오면 반드시 흔들어 먹어야 하는 먹물 우유도 주고, SNS 후기를 작성하면 추첨해서 때도 밀어준다니 혼자서도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목욕탕 입구에서 100원을 냈더니, 진짜로 20원을 거슬러 주는 문어목욕탕. 호기롭게 왔지만 그래도 역시, 혼자 있는 건 뻘쭘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숨고 싶다. 숨어 있기 적당한 곳을 발견했으니 바로 먹물탕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먹물탕 안에서 벌어진 기막힌 사건 덕분에 몸의 때도, 외롭고 두려운 마음도 깨끗이 씻겨나간다. 아이는 먹물 우유를 빨대로 쪽쪽 빨며 말한다. 내일 또 오겠다고. 대체 목욕탕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엄마 없는 아이'를 에둘러 말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가 신선했다. '난 엄마가 없으니까'라는 말 자체에 이미 아이의 당당함이 배어 있었다. 목욕탕에 혼자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지만, 마음은 단단한 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문장이었다. 이 아이를 끝까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 '아, 시원해' 하고 나오는 주인공 뒤로 보이는, 목욕탕에 혼자 온 다른 아이까지도 말이다. 그 아이가 엄마가 없는지 혹은 아빠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문어목욕탕에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조금 당당해도 좋을 것 같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재미를 알게 될 테니까.
그런데 이 그림책을 본 우리 아이들은 내가 생각지 못한 의외의 것들을 많이 발굴(?)했다. 가령, 이 그림책에 나오는 숫자 중에 유독 8이 많은 이유 같은 거. 맞다. 문어 발이 8개라 그랬는지 목욕탕 전화번호도, 목욕탕 도로명 주소도, 목욕료도, 음료값도 심지어 라커키에도 8자가 선명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목욕탕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인 장면도 찾아냈다.
그런데 드는 의문 하나. 목욕탕은 주말이 피크인데 문어목욕탕은 왜 일요일에 쉰다는 걸까. 아무리 봐도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전단에 적힌 이 번호로 연락하면 들을 수 있으려나. 888-8888. 아참, 문어목욕탕 이용 팁. october(10월) 한 달은 무료란다. 개인적으로 '98% 먹물과 2% 원두'라는 '먹무리카노' 맛이 참 궁금하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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