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 2'에서 안나 공주의 남자 상대역 크리스토프는 조신한 캐릭터다. 크리스토프는 안나와 엘사 앞에서 남자랍시고 내가 리더 역할을 맡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여자 주인공들을 보조해주는 선에서 딱 멈춘다. 심지어 안나와 엘사가 아렌델을 구하는 모험 서사가 진행될 때는 어디 갔는지도 모르게 자취를 감춘다.
그가 딱 한 번 화려한 조명을 받을 때가 있는데, 안나에게 청혼할 기회를 잡지 못해 괴로워하며 솔로곡을 부를 때다. 안나와 엘사는 나라가 위험에 빠져 걱정 중인데, 크리스토프는 사랑 타령을 하는 것이다. 큰일은 여자가 하고, 남자는 여자를 돕는다. 안나가 아렌델의 왕이 되면서 크리스토프는 왕의 남편이 된다. 얼음장수였던 크리스토프가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하는 것이다.
이처럼 '겨울왕국 2'에서는 전통적인 성 역할이 뒤집혀 있다. 그놈의 왕자 찾는 공주가 안 나오는 데에서 더 나아가, 남자 캐릭터가 그야말로 조연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섬세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점은 '겨울왕국 2'의 영리한 지점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프 캐릭터가 신선하면서도 귀엽고, 바람직해 보였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스크린 너머 가상의 캐릭터를 볼 때의 이야기였다. 내 아들이 자신은 ‘큰일’에 관심없고 사랑이 전부라고 하면 어떨까. 잘나가는 여자친구를 만나서 본업을 버리고 주부의 삶을 살겠다고 하면 어떨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안의 편견과 마주했다. 나는 지난 대선 때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배우자만 봤을 때, 심상정이 가장 흥미로운 후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남편을 뭐라고 부르냐는 질문에 2012년 국립국어원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아직 호칭이 정해지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싱글이었기 때문에, 심상정이 대통령이 됐다면 대통령의 남편을 부르는 호칭을 새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심상정의 남편 이승배 씨는 주부였다. 그는 한 신문기사에서 젊은 시절 심상정을 만나 ‘천박한 성의식’이 많이 깨졌다고 고백했고, 심상정이 국회의원이 된 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세우자’는 심정으로 스스로 주부가 됐다고 했다. 여자 대통령과 주부 남편의 구도가 현실이 된다면 한국에 새로운 가족상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희망도 그게 남의 집 일이었을 때 품을 수 있는 속편한 바람이었나 보다. 크리스토프와 이승배 씨는 정치인의 전업주부 남편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멋지다고 외치다가 내 아들이 그들이 된다고 생각하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다. 아들이 대통령감과 연애할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 전업주부가 된다고만 가정했을 때 말이다.
◇ 내 안의 '편견'이 박살나고 나서야 내 다짐도 다시 보게 됐다
나의 이런 거부감과 걱정은 주부가 하는 무급의 돌봄노동이 직장인들이 사회에서 임금을 받고 하는 노동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주부의 일은 사소하고, 바깥일은 중차대하다는 생각이 내 무의식에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직장인이자 주부인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고 되려고 하는 내가, 내가 하는 돌봄노동의 가치가 터무니없이 평가절하되고 있다고 소리 높이던 바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내 안의 편견이 박살나고 나서야 아들에게 집안일을 일찍부터 가르치겠다던 기존의 내 다짐도 다시 보게 됐다. 자기 양말 한 켤레 빨아본 적 없는 무능한 남자로 키우고 싶지 않았지만,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전담’하는 남자로까지는 키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 나란 엄마의 진심이었구나.
누군가는 “왕의 남편이 된 크리스토프는 집안일 안 할 텐데요?”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남자가 집안일을 하고 말고 하는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잘난 존재여야 한다는 허위의식을 벗는, 그야말로 태도의 문제다.
영국 왕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크라운'을 보면 엘리자베스 왕의 남편이 내조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을 견디지 못해 끝도 없는 부부 갈등이 펼쳐진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또한 딸이 전업주부가 된다고 가정했을 때보다 아들의 경우가 훨씬 더 걱정스러웠다.
엄마인 나부터 가정을 지키는 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야, 남자가 여자보다 사회적으로 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그런 가치관을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들을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하는 남자로 키우고 싶다는 나의 목표를 살짝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자기 한 몸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도 돌볼 줄 아는 남자, 훗날 파트너가 될 상대와 (자녀를 낳는다면) 그 자녀를 돌보는 일도 성평등하게 해낼 수 있는 남자로 키울 수 있기를.
인생 18개월차 아들아, 너는 지금 속편하게 코 골며 자고 있지만 이 엄마는 어깨가 무겁구나.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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